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저는 축구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습니다. 멋진 몸놀림을 보는 것은 물론 기분 좋은 일이고, 우리 편이 이기면 제 기분도 좋아집니다. 하지만 그건 제 경우엔 어느 스포츠 종목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또 꼭 스포츠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닙니다. 연예인이나 예술가가 무대에서 혹은 전시공간에서 선사하는 성취-더욱이 주인공이 한국인이라면 더- 를 보면 저는 기분이 좋습니다.
다만 무리에 섞여 응원하며 열광하고 낙담할 만한 열정이 제겐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의 열정이 전 조금 불편합니다. 집단, 단결, 한마음, 한목소리, 한길…. 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니면서 그런 말들을 너무 많이 들은 탓일까요? 아니면 유년의 70년대 TV와 라디오, 그리고 학교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통해 귀에 못이 박힌 탓일까요?
대상과 지향과 가치는 경우에 따라 사뭇 다를 수 있지만, ‘뭉치자’는 것은 대립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욕망의 주된 방편이 되기 쉽습니다. 승리한 자는 기쁨에 도취되어 단결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될 것이고, 패배한 자는 절치부심 더 큰 힘, 더 큰 내일의 집단을 꿈꾸며 목청을 돋울 것입니다. 하지만 뭉친 집단 안에서 개인은 사라져버리거나 과소평가되기 쉽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땅히 박수를 보내야 할 멋진 플레이도 내 집단의 승리에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저지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것은, 제 경우에는, 축구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관전법입니다.
사실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이성도, 지향하는 방향도 망각한 채 집단으로 움직인 결과가 죽임이 아니라 살림의 길로 나아간 예는, 서글프게도 인류의 역사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파리코뮌? 알제리내전? 식민지 해방전쟁? 봉건 권력의 압제에 저항했던 민주·사회주의 운동사…? 그런 선한 집단의 동력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사례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예들은 집단적 힘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는 사례라기보다 집단의 몰이성적 폭력에 견디지 못해 어쩔 수없이 분출된 고발과 폭로의 사례라고 하는 게 더 옳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지금 지난 세기의 한 복판을 피의 역사로 물들게 했던 이탈리아와 독일의 파시즘과 일본의 군국주의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축구 응원 이야기에서 파시즘의 그늘을 끄집어내는 것은 분명히 비약입니다. 다행히 축구는 대개 전ㆍ후반 90분으로 종료되고, 월드컵도 일정을 마치면 막을 내립니다. 그럼으로써 한없이 상승할 것 같던 집단논리의 열정은 냉각되고 차분해집니다. 월드컵의 하이라이트인 결승전은 내 나라 선수들이 뛰는 경기가 아니어도 누구나 즐겨 관전합니다. 물론 거기에도, 국적과 무관하게, 내 편 네 편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 국가대표팀의 경기 때와는 사뭇 다른 긴장과 흥분과 애정으로, 요컨대 훨씬 차분하고 알차게 그 경기를 즐기게 됩니다. 승자에게는 성원의 박수를, 패자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아름다운 전통도 우리 인류는 스포츠정신이라는 이름으로 가꿔냈습니다. 그럼으로써 스포츠의 짧지만 강렬한 승부의 일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덜 열광적인 삶의 일상으로 천천히 복귀합니다. 하지만 집단의 기억은 어쩔 수 없이 남아, 지금 우리가 2002년 월드컵 당시의 광화문의 함성을 기억하듯, 4년 뒤를 기약하곤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스포츠의 열정이 일상의 열정으로, 혹은 역으로, 전이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경기에서 생긴 앙금이 민족감정으로 비화하기도 하고, 역사적 경험이 스포츠의 승부 세계에 투사되기도 합니다. 며칠 전 일본과 네덜란드의 월드컵 예선 경기가 중계될 당시 저는 홍대의 한 음식점에 있었는데, 후반전 네덜란드 선수가 득점을 하자, 식당에 있던 젊은 관객들 거의 대부분이 환호성을 올렸습니다.   
저는 지금 수경스님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납니다. 조계종 승적도 내려놓습니다. (…) 번뇌했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길을 떠납니다. 어느 따뜻한 겨울, 바위 옆에서 졸다 죽고 싶습니다.”는 글을 남긴 채 그는 집단의 대열에서 벗어나 개체의 자리, 오롯한 개인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수경스님의 삶과 수행의 내력을 저는 잘 모릅니다. 다만 그의 삶이 언제나 상생과 정의의 대의를 지향했고,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의 대오를 이끌며 언제나 그 맨 앞자리에 서있었다는 사실만 막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랬던 스님이 실로 급작스럽게 떠난 사실을 두고 해석들이 분분하고 그 틈에 요설(妖說)들도 끼어드는 듯합니다. ‘다시 길을 떠나며’라는 제목으로 남긴 글에서 스님은 “제게 돌아올 비난과 비판, 실망, 원망 모두를 약으로 삼겠습니다”라고도 썼다고 합니다. 
제가 스님의 글에서 가장 아프게 읽은 것은, ‘대접받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거나 ‘죽음이 두렵다’거나 하는 구절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구절입니다. 짧은 구절이니 다시 옮기겠습니다.
환경운동이나 NGO단체에 관여하면서
모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비록 정치권력과 대척점에 서긴 했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라는 스님의 말씀에서 집단의 가치를 넘어서는 개체의 가치, 개인의 가치를 읽습니다. 스님으로서, 환경운동가로서, 아니 온 존재를 지탱해 온 모든 사회적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키는 결단은 소신(燒身)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인격적 자살입니다. 스님은 다시 길을 떠남으로써 실존적 인간의 참된 가치는 집단의 숫자 너머에, 권력과 대항권력의 너머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에게 일깨웁니다. 그의 결단이 4대강 반대운동에, 생명살림운동에 새로운 동력이 될지 안 될지를 따지는 것은 당장에는 부질없어 보이지만, 저는 무엇보다 큰 영혼의 가르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뭉친 하나, 결집된 한 목소리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생명 그 자체의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을 스님은 말하신 듯합니다. 
 
거의 모든 언론이 염원을 담아 승리를 호언하던 대(對) 아르헨티나전에서 한국 대표팀은 크게 졌습니다. 하루 전만 하더라도 대표팀 감독의 리더십을 찬양하는 목소리만 실어 나르던 온ㆍ오프라인 언론들은 독자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감독의 전술적 오류를 성토하는 글들을 소개합니다. 그러곤 다시, 16강 진출의 가능성을 한껏 돋우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염원을 담아.
아르헨티나 전에서 승리했을 경우 무려 1조원의 광고 시장이 새로 만들어진다고 한 조사기관이 전망했다고 합니다. 아주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16강 진출의 가능성은, 언론사들에게는, 그 어마어마한 돈의 가능성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자면 기업들의 광고예산이 주시하고 있는 집단의 열기는 선결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심연에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패거리주의, 다시 말해 집단주의의 광기로 변질되기 쉬운 괴물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역시 비약이긴 합니다만, 아주 작은 가능성조차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물론 진의는 다른 것이었다고 하지만-을 입고 거리 응원전에 나섰다가 낭패를 볼 뻔했다는 한 축구팬의 이야기는 그래서 섬뜩합니다.
전체주의와 맞설 때 개인주의는 긍정적인 가치를 대변합니다만, 공동체주의와 맞서는 개인주의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띠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건강한 공동체주의는 건강한 개인주의와 결코 맞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개인주의는 건강한 공동체주의의 굳건한 토대입니다. 그것을 굳이 마주 세우는 논리가 있다면, 그 때의 공동체주의는 탈을 쓴 전체주의일 가능성을 의심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수경 스님의 떠남을 현안과 맥락을 넘어 보다 깊고 진지한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