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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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던 불이 꺼지면 끓던 물은 잠잠해 진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군종교구장


『선가귀감禪家龜鑑』에 “허물이 있으면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이것이 대장부의 기상이다.” 하였습니다.
허물이 있으면 그 허물을 고쳐서 스스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면 이내 잘못도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참회라는 것은 자신이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또다시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자 맹세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안으로는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허물을 드러낼 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텅 비어 있어서 고요적적하므로 어떤 업業도 그곳에 깃들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화엄경華嚴經』 「이세간품離世間品」에 보살菩薩은 열 가지 닦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불자佛子여,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은 열 가지 닦음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바라밀다를 닦고(修諸波羅蜜) 배움을 닦고(修學) 지혜를 닦고(修慧) 이치를 닦고(修義) 법을 닦고(修法) 뛰어남을 닦고(修出離) 나타냄을 닦고(修示現) 부지런히 행하며 게으르지 않음을 닦고(修勤行匪懈) 정등각을 이룸을 닦고(修成等正覺) 바른 법륜을 굴림을 닦나니(修轉正法輪), 이것이 열이니라.”


『능엄경楞嚴經』에 따르면, 내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 우리는 스스로 반응하게 훈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사회적 언어로는 조건반사條件反射라고 할 것 입니다. 중생衆生의 몸은 육신이고 부처님의 몸은 법신法身입니다. 육신과 법신이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육신을 떠난 법신, 법신을 떠난 육신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분별식심分別識心으로 보고 느끼고 이해할 뿐입니다. 육신과 법신은 다르지 않아서 법신의 그림자가 육신입니다.
금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도 금은 금입니다. 모양이 바뀌었다고 금이 아닐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금의 본질本質은 그대로 금金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형상에 취해서 모양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어떤 사람이 금을 녹여 요강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금으로 만든 요강이라도 그릇으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금으로 만들었어도 요강은 요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강단지를 모르는 서양에서는 금이 아니라 무쇠로 만들었어도 요강으로 사용할 사람은 없습니다. 아마도 그 안에 무엇인가를 넣고 쓸 것입니다. 동서양東西洋의 문화文化는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양에 너무 집착하고 살다 보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를 깨우쳐 주기 위하여 “이 몸은 부질없는 것이다. 허망한 것이다. 무상한 것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금이지 모양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수행자修行者의 정진精進이요
닦음의 안목眼目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천상이나 인간세상에서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속박 하나이까?”
우리들의 마음에는 자유롭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을 욕심慾心이다, 무명無明이다, 중생심衆生心이다, 하는 것입니다.
누가 있어, 속박하고 구속하고 얽매이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
“간탐어물.貪於物은 시마권속是魔眷屬이요, 자비보시慈悲布施는 시법왕자是法王子”라 했습니다.
간탐은 번뇌煩惱를 일으키는 주범입니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목적의식에 사로잡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상모략하고 시기질투하고 권모술수 쓰며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널려 있습니다.
개인적인 이익에 목말라하다가 결국 세월호 같은 참사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서 한국경제는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피해와 국민적 공황장애를 가지게 하였습니다.
간탐과 질투는 어디에서 생깁니까?
한쪽으로 치우치면 얽매이고 빠져서 구속되고 속박 됩니다. 그것을 연기법緣起法으로 들여다보니 무명無明입니다. 무명이라는 것은 어둠입니다. 어리석음입니다.
그 어둠은 무엇으로 생긴 것입니까? 방일放逸에서 생긴 것입니다. 방일이라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그 게으름의 극치인 방일은 뒤바뀜(전도몽상顚倒夢想)으로 생겼습니다.
전도몽상은 왜 생겼을까요? 의심疑心으로 인해서 생겼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리석고 욕심 많은 사람들이 의심합니다.
구룡사와 여래사에서 긴 시간, 정담情談을 나누며 정진하는 불자들은 소중한 인연因緣입니다.
이렇게 많은 불자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축복이고 복된 일입니다.
서로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새로운 불자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우리들의 허물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전도傳道하지 못했기 때문 입니다.
우리는 인연 있는 이웃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양분이 되어야 합니다.
확신과 믿음으로 가족들에게 그늘이 되고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나를 구속하는 속박의 출발점은 의심입니다. 의심은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고정관념으로 얼굴만 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금으로 만든 목걸이, 반지, 귀걸이가 모양은 달라도 본래 재료는 금金인 것처럼, 우리들이 윤회輪廻하는 시간 속에서 변화되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은,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는 봄은 이래서 좋고 그래서 싫고, 여름은 이래서 좋고 그래서 싫고, 가을은 이래서 좋고 그래서 싫고, 겨울은 이래서 좋고 그래서 싫다고도 합니다. 불자들은 의심으로부터 생기는 속박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누구도 시간에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루를 살아도 행복하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루를 살아도 천년만년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땐 천년만년 살 것처럼 시작하고 저녁에 누울 때는 오늘밤이 마지막 밤이지, 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친절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라.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꿈을 꾸기 위해서 시간을 내라. 뜻을 품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서 시간을 내라. 받는 자의 특권이다. 주위를 살피는 데 시간을 내라. 이기적으로 세상을 살기에는 타던 불이 꺼지면 끓던 물은 잠잠해 진다
너무 짧은 하루다. 웃기 위해서 시간을 내라. 영혼의 음악이다.’
이 글은 아일랜드 민요입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생각할 여백이 있습니다.
닦음, 배움, 비움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모두가 편안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필 수 있는 삶이 바로 바라밀다를 수행하는 생활 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지 않고 사는 삶입니다.
한 제자가 부처님께 묻습니다.
“의심이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대게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 의심이니라.”
요즘 사람들은 대화 하면서 ‘정말’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말’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거짓말’을 그렇게 많이 하였기에 ‘정말’이라는 수식어를 입에 달고 살까 싶습니다.
얼마나 냄새가 나면 정말이라는 화장품을 향수로 덮어쓰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라도 대화를 할 때 ‘정말’이라는 수식어 대신, 항상 상대방에게 진실한 말을 하면서
살았으면 합니다.
타던 불이 꺼지면 끊던 물은 잠잠해 집니다.
의심 때문에 속박과 얽매임을 가졌던 일들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asanjungw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