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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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의 교육개혁

최윤필 / 한국일보 기자


조계종 교육원이 스님의 재교육 연수를 의무화하기로 했다. 특정한 소임을 맡게 된 스님들만 모아 시행하던 연수교육을 구족계 받은 모든 스님을 대상으로 확대하고, 권역별로 진행되던 본·말사 주지 연수도 연수교육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강좌의 내용도 ‘파격적’이다. IT업체 대표가 온라인·모바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음향감독이 설법능력을 향상시키는 기술을 들려준다. 언론정보학 교수가 리더십과 커뮤니케이션을, 대기업 경제연구소 간부가 달라진 세상과 불교의 역할을 강의한다. 이제 스님들이 3급, 2급, 1급 승가고시(법계 승급을 위한 시험)에 응시하려고 해도 이 연수 교육을 반드시 이수해야 할 모양이다.
교육원은 앞서 승가교육의 핵심인 강원(講院·지역 승가대학)의 교육체계 현대화를 선포하기도 했다. 수업 내용과 방식을 다양화하고 한글 교재도 채택한다는 거였다. ‘《치문경훈(緇門警訓)》’에서 시작해 ‘《화엄경(華嚴經)》’으로 맺는 강원 커리큘럼은 조선 후기에 정착돼 300년가량 이어져 온 서당식 교육법이다. 그 오랜 관행에서 벗어나 인문교양과 어학 등이 포함된 새로운 커리큘럼으로 교육 전반을 개편하고 참선과 법문, 상담 등의 실습 교과도 포함시킨다는 게 교육원의 구상이다.
이 일련의 변화들은 교육을 통해 한국불교의 새로운 물길을 열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깨달음의 토굴만 더 깊이 파고드는 것에서 벗어나 낮은 세상 속으로 실핏줄처럼 넓게 퍼져나가야 한다는 전환의 물길이다. 요컨대 한국불교가 이른바 참된 대승의 길을 모색하고 나선 것으로 나는 이해하려는 것인데, 이 엄청난 시도를 반기는 것은 현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스님에 대한 사적인 신뢰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사정을 잘 모르긴 하지만, 현응 스님은 가히 혁명적 변혁이라고 해도 좋을 이 근원적 변화의 물꼬를 열고 물길을 잡아가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연초에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현응 스님을 뵈었다. 그 날 스님은 <깨달음과 역사>라는 막 재출간된 당신의 저서를 자리에 함께 있던 이들에게 한 권씩 건네면서 “오래되고 낡은 글이라 내보이기 부끄럽다”고 말하곤 정말 겸연쩍은 듯 웃었다. 하지만 그 책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어온 터였다. 스님 세수 30대 초·중반에 이런저런 잡지에 글을 쓰셨는데, 그 글들을 도반이던 해인사 출판부장(법연 스님)이 1990년에 책으로 냈다는 것. 깨달음을 중시하는 한국 선불교의 전통과 어른 스님들의 지향에 살짝, 때로는 대놓고 맞서는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주장과 불교에 대한 이해로 주목 받았다는 것. 어쩌다 책은 금세 절판됐지만 지금껏 젊은 학인 스님들이 책을 복사해서 돌려보곤 한다는 것. 80년대 민중불교운동의 한 축을 지탱했다는 스님의 수행 이력과 이제 그가 조계종단 스님 교육을 책임 맡은 자리에 섰다는 사실까지 어지럽게 떠올리며 나는 서둘러 책장을 더듬어 나갔고, 더듬다가 띄엄띄엄 마음에 걸리는 의문들을 무람없이 스님께 여쭙곤 했다. 스님은 수저를 들다가도, 심지어 저작(咀嚼) 중에도 입을 가린 채 열성으로 설명했고, 허약한 배움의 밑천에다 예법에마저 트릿한 나는, 눈치 없이, 들어도 모를 되잖은 질문들을 해나갔던 것 같다. 그 날 스님은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내가 지금 기억하는 것은 그 어떤 버릇없고 무식한 질문에도 스님의 얼굴에서 예의 삼가는 듯 숫저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 밖에 없다. 여유는 자신감에서 배어 나오고, 자신감은 오래 굳힌 신념이 그 토대를 이루는 법이다. 요지부동의 신념이란 융통성 없는 광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해온 터여서, 그 날 나는 스님의 미소와 스님이 준 ‘오래되고 낡은’ 글 묶음을 들고 오면서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귀가한 뒤 나는 그 책 <깨달음과 역사>를 단숨에 읽었고, 한 동안 불교가 화제로 거론되는 자리에 끼일 때마다 그 책을 들먹이며 일독을 권했다.


책은 6개의 장으로 나뉜다. 사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수필처럼 쓴 글도 있고, 강론한 것을 글로 옮긴 것도 있고, 불교철학과 사회철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불교의 건강한 내일의 이론적 토대를 모색하는 글도 있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지평 너머를 모색하는 난해한 글도 있지만, 스무살 사미 시절 헤세의 <지와 사랑(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을 읽고 골드문트의 낭만이 부러워 야밤에 해인사 아랫마을의 여선생 숙소 방문을 두드렸다는 일화처럼 유쾌한 읽을거리도 섞여 있다. 하지만 그가 신념해 온 한국불교의 진면목은 1987년 1년 동안 월간 <해인>에 연재했다는 편지 글(제1장) 속에 다 들어 있는 듯하다.
당시 32세의 젊은 스님은 1월의 첫 편지글에서부터 학교에서 가르치는 ‘한국불교=대승불교’의 등식에 대해 딴지를 건다. 


“대승(大乘)이란 방편바라밀을 구비한 것이고, 소승이란 그렇지 못한 것이라고 봅니다. 곧, 자전거를 두고 이야기할 때 두 개의 바퀴가 쓰러지지 않고 설 수 있는 역학적인 균형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이라든지 그것을 몸으로 습득하여 운전할 수 있게 되는 일은 여전히 소승일 터이고, 그 자전거를 타고 어떤 목적과 목표를 세워 운전해가는 일은 대승일 터입니다.”


그런 뒤 대승불교의 실천적 주체 곧 ‘보살’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보살이란 알다시피 보리(보디)와 살타(사트바)의 합성어입니다. 이때 보리란 연기적 존재(空)를 이해하는 관점 곧 깨달음이고, 살타는 그것이 구체적인 상황과 역사에 적용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중략) 보살의 이러한 구체적이고도 역사적인 처지와 행동양식을 일러 대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여섯 바라밀(베풂의 보시바라밀, 도덕적 실천의 지계바라밀, 인내의 인욕바라밀, 노력의 정진바라밀, 집중의 선정바라밀, 지혜의 반야바라밀)이 모두 소승의 영역에 있으며, 진정한 대승이 되려면 역사적 구체성이 포함돼야 하는데, 그것을 방편바라밀이라 일렀다.
“여섯 바라밀을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구현하느냐, 다시 말해 역사화하고 구체화하느냐가 방편바라밀인데, 여섯 바라밀이라는 보편적이고도 추상적인 노력을 구체적인 방편바라밀과 결부시킬 때 비로소 대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고 봅니다.”


책에서 스님은 모든 시비분별을 떠난 초연한 은자 같은 태도, 부처와 깨달음, 진리라는 말까지 절대화하고 신비화하려는 시도,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들먹이며 엉터리 같은 허무주의로 빠져드는 행태는 잘못이라고 스님들에게, 부처를 받드는 일반인들에게 선명하게 못박고 있다. 심지어 그는 “신이나 성스러운 영역이나 가치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교의 인식은 종교적 인식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고 썼다.     
 
밥을 나누던 자리에서 스님은 불교가 명상·참선의 신비주의로 경도되고, 일반인에게 무심한 종교로 인식되는 것을 우려하며 이런 말씀도 했다.


“조는 듯한 침묵과 웃을 듯 말 듯 달관의 무관심이 적멸과 열반의 경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는 ‘무심(無心)’의 왜곡입니다. 참된 무심은 빈 것이 아니라 꽉 찬 것이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며, 중간의 중립이 아니라 특정 견해나 생각을 표현하는 속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모든 스님이 깨달음(보리)과 역사(살타)를 하나로 아우르는 ‘보살’로, 현응 스님의 신념처럼 한국불교의 실천적 주체로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보리와 살타가 불화하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도 않으면서 한결같이 나란하기를 바라는 것 또한 욕심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미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보살의 길을 고집스레 걸어 온 스님들이 적잖이 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불교가 지금껏 건재했던 것일 테고, 세속의 대학들이 해마다 바꾸는 교양·전공 커리큘럼을 300년이 넘도록 바꾸지 않았던 것일 테다.
그것을 이제 바꾸겠다는 것이다. 더는 버티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한 걸음 더 고양된 붓다의 길을 열어가겠다는 의지로 이해하고 싶다. 배가 방향을 틀면 선체는 흔들리기 마련이다. 흔들림의 정도는 적어야겠지만, 설사 좀 어지럽더라도 키를 제자리로 되돌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지 않으면 밀려날 수밖에 없는, 흐르는 물길 위에 이미 들어섰으므로. 한국불교가 조금씩 흔들릴 모양이지만, 그 흔들림은 건강한 균형 - 깨달음과 역사의 균형 - 을 위한 흔들림이리라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