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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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영원

수덕스님
가평 대원사 템플스테이 관장


우주정거장 수덕산역에는 여행할 사람들로 붐비었다. 심지어 도마치재 고갯길을 넘도록 줄은 이어갔다. 이 사람들은 죽어서 판정을 받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셀 수 없이 많은 문들은 이 사람들을 수용하기에 충분하다는 세라공주님이 설명해 주었다. 곧 하늘 위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 우리 모두가 들을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추상적 개념으로만 있었던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떤 정확한 해답을 보듯 명확해졌다.


우리들은 본래부터 갖고 태어난 아름답고 참된 성품을 버리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중상모략하고 싸우고 죽이며 죄악의 짓는 수가 많아져 그 죄악의 갚음으로 세상에는 난리가 잦고 재앙이 많아졌다. 사람들의 얼굴도 사나워지고 몸은 약해지고 수명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무법과 삿된 법이 성해지므로 세상은 점점 어지럽고 복덕 있는 사람과 도(道)가 있는 사람은 모두 수덕산 근처에 숨었다. 모든 사람들이 원수 맺고 마음 빚짐을 풀고 갖은 고통 벗어나서 좋은 복락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 그때 나의 머리를 스치는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다.
수덕산에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숲속을 보노라면 온갖 생명들이 풍요롭다. 하지만 몇 발자국마다 죽어 쓰러진 나무들이 즐비하다. 그 나무들의 해체들 속에 새로운 생명 탄생을 보게 된다. 미생물이 해체에 참여하고 그 속을 이루었던 지수화풍의 분자들이 재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 어디를 보아도 죽음은 없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다.
삶에는 반대가 없다. 죽음의 반대는 탄생이다. 그리고 삶은 영원하다.
우리 인간들이 가진 삶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더욱 그러하다. 모든 현자들과 시인들이 그렇게 노래했다. 우리들의 삶이란 튼튼한 대지를 딛고 있는 현실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그런 것이리니….


우리들의 죽음의 순간을 볼 수 있다면 연극의 마지막을 보듯 꿈과 같은 것이리니 하지만 꿈속에서도 진정 존재하는 실체는 있을지니 의식이 바로 그것이라.
그 의식의 실체는 정견에서 나왔다. 그러니 바로 보고 바른 견해를 갖으라. 모든 것을 바로 볼 때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가진 고통을 끝내고 진정한 자유를 얻을지니 그것이 진리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끝내고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면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순간을 바라보고 바른 견해를 갖으며 마치 내 스스로 그것을 온전히 선택한 듯 긍정과 감사로 살아야하리. 그것이 내 삶의 주인이 바로 나이며 주인 된 자의 삶에 시작이리라.
우리들은 남의 죽음을 통하여 나의 죽음을 경험한다. 큰상실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렇듯 삶을 살다보면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명예와 직업, 몸의 일부나 기능을 잃기도 한다. 그렇게 깊은 상실을 겪을 때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던 무언가가 죽어버린다. 내가 누구라고 알고 있는 자아상이 점점 적어지고 초라해진다. 심지어 방향감각을 상실하기도 한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잃은 나는 그럼 누굴까?
전철 안에서 악마의 화신이 마라에게 물음을 받고 총을 맞아 죽은 나는 누구지?


무의식중이라도 나의 일부라고 동일화했던 그 어떤 형상들이 나를 떠나거나 해체되면 매우 고통스럽다. 이를테면 내 존재의 그물망에 큰 구멍이 뚫린 기분이다. 내 가슴에도 그런 고통의 구멍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잊지는 마라. 부정하지도 마라.
고통이 거기 있음을 받아들이라. 우리의 생각은 아직도 상실의 주변에서 얼씬거리며 나를 피해자로 만들어간다. 그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와 원한과 자기 연민 등이 따라와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들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잘 살펴보라. 그리고 알아차리라. 내 마음의 구멍에 강한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공허함도 느껴보고 알아차리라. 그 낯선 공허함 뒤에 찾아오는 절대고독도 느껴보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이 일어나면 더 이상 두려움이나 큰 상실의 고통은 없다.
그것에는 알싸하거나 부드럽거나 어머님의 품같은 안락의 평화가 있을 뿐이다.
모두 마음을 열고 들어보라. 우리의 삶은 얼마나 잠깐인가?
우리가 가진 선험적 체험은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가?
이 세상에 탄생과 죽음을 벗어난 것, 영원한 것이 있는가?


열여덟에는 내 몸이 튼튼하고 힘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육십에는 내 몸이 약해졌음을 안다. 그것처럼 생각도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내 몸이 젊거나 늙었다고 아는 마음, 내 생각이 변했다고 아는 맑은 마음에는 변한 것이 없다. 그 맑은 마음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영원의 빛이다. 그것을 우리는 순수의식이라 부른다. 어떤 형상을 벗어난 ‘한 생명’이다.
나는 그것을 잃을 수 있는가? 아니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 과정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모든 행동이다.
우리들의 삶은 하나의 과정이며 깨달음이 목표이다. 우리들의 목표는 다시 한 번  영적진화를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실패자들은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편견과 모순과 불합리성을 자기의 재미와 이익을 위해 이용하거나 비난만 할 것이다.


그러니 바로 보라!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어떠한 가시적 목표나 핑계도 없이 남들이 지은 이야기나 세상의 틀을 벗어나서 깨어나는 일이다. 어제까지의 그대가 바라보았던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기 위한 시도를 시작해보라.
지금 안드로메다를 넘어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곳을 향해 여행준비를 마쳤다. 푸른 물빛으로 만들어진 비행기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환희심으로 가득했다. 시방세계의 안드로메다를 지나고 아스트랄계를 넘어서면 허공 끝에 있는 보리사트바(Bodhisattva)의 나라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가 혼자서 꿈을 꾸면 오로지 꿈에 그치지만 모두가 함께 새로운 영성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꿈을 꾼다면 그것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라는 ‘훈데르트 바서’의 말처럼 말이다.


들어보라!
지금 하늘에서 들리는 천상의 노래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