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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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변경에 대한 단상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이름’이란 사람을 비롯한 뭇 생명과 사물, 공간과 시간 등 우주 삼라만상 개개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밑바닥 얼개다. 그러므로 존재론의 뿌리다. 또 우리가 낯선 사람을 만나거나 낯선 공간과 대면할 때 이성(理性)으로써 맨 처음 확인하는 것이 이름이다. 그럼으로써 이름은 존재론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름은 변별의 수단이기에 앞서 시공간 속 숱한 관계의 좌표 속에 먼저 자신을, 그리고 관계 속의 타자(他者)를 위치시키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불교식 표현을 빌자면 연기(緣起)사슬의 매듭이 곧 이름이다. 김춘수 시인의 작품‘꽃’의 첫 구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은 시적 상징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정돈해 표현한 직설적 표현에 가깝다.
인간이 지금처럼 성과 이름으로 명명되고 호명되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 근대라고 명명된 시대 즈음부터라고 한다. 우리의 경우 갑오경장 이후이고, 서구 사회에서는 르네상스 말기인 16세기 전후부터다. 그 전에도 이름은 있었지만 그 이름은 호명의 편의를 위한 기호로써, 좁은 공동체 내의 제한적 관계 속에서만 의미 있게 통용될 뿐이었다. 그나마도 성(姓)은 세상의 공식적 질서 속에서 행세할 자격이 부여된, 양반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서양 역시 이름 뒤에 성이 붙기 시작한 것은 삶의 공간이 본격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우르비노 출신의 라파엘로라 하여 ‘라파엘로 다 우르비노’가 됐고, 빈치 가의 레오나르도라는 의미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 불렸다. 18세기 이후가 되면서 정체성을 선명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름 -특히 귀족의 이름-은 장황해져, 지금도 그 흔적이 서양의 명문가에서는 남아있다. 이제 우리는 가문을 따져 성을 달고, 의미와 어감을 따져 이름을 짓는다. 그리고 그 이름은 지문(指紋)처럼 우리의 생애 내내, 또 죽은 뒤로도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인다.
또 이름의 의미는 시대와 역사를 초월해 부각되는데, 그 때의 이름은 그야말로 존재 자체의 의미를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머는 서사시 <오디세이>를 통해 오디세우스와 외눈박이 괴물 키클로프스의 이야기를 전한다. 올림푸스의 신들이 인간과 더불어 살았다는 기원전 120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그 서사시에서 오디세우스의 함대는 트로이 전쟁 후 귀국길에 한 섬에 표류, 부하들과 함께 거인 괴물 키클롭스에게 붙들려 잡아먹힐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달콤한 이야기로 괴물의 호감을 사고, 서로 통성명을 한다. 먹이관계가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가 맺어진 뒤 첫 대화의 제재가 이름이었던 것이다.
키클롭스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폴리페모스라고 소개하자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우티스’라고 밝힌다. 그리스어로 우티스(ou-tis)는 ‘아무도 아니다’라는 의미.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디세우스는 진정한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후 교묘한 지략으로 키클롭스의 외눈에 말뚝을 박고 탈출에 성공한 오디세우스는 바다 위 자신의 배 위에서 자만과 허영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의기양양하게 외친다.
“폴리페모스, 혹시 누가 너에게 네 외눈을 멀게 한 자가 누구냐고 묻거든 오디세우스가 그랬다고 대답해 주거라. 이타케 섬의 오디세우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낸 탓에 오디세우스의 귀로(歸路) 20년은 더욱 험난해진다. 키클롭스가 그의 아버지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오디세우스에 대한 저주를 청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주는 ‘아무도 아니다’에게 내릴 수는 없다. 저주든 칭송이든 모든 관계와 작용의 출발은 대상을 호명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역사가들에게는 땅 이름이 ‘역사의 지문(指紋)’이다. 왕조가 바뀌면 맨 처음 수도를 옮기거나 기존 지명을 바꾸는 예는 역사 속에서 흔하다. 그럼으로써 정치는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 곧 새로운 의미화 작용을 시작한다.
러시아의 두 번째 대도시이자 로마노프왕조의 수도였던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숱한 동란과 혁명으로 굴절된 역사의 상징 같은 도시다. 1905년 ‘피의 일요일’의 현장이었던 겨울궁전의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제1차 러시아혁명의 와중에 페트로그라드(1914년)로 바뀌었다가 10년 뒤 레닌 사후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레닌그라드’로 변경된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인 1991년 옛 이름으로 회귀했다. 지명은 바뀌었지만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는 그 이름 그대로 지금도 불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레닌그라드 공방에서 겪은 소련 국민들의 고난과 인내, 그리고 전승의 환희와 감격을 표현한 이 곡 안에서, 소비에트의 정치적 이상과 현실에 대한 동조여부와 상관없이, 레닌그라드라는 지명은 지금도 건재한 것이다.
하지만 지명에는 권력의 변천과 관계없이 그 땅과 함께 이어져온 삶의 역사, 문화의 역사 역시 배어 있다. 서양 여러 주요도시들이 그 이름으로 드러내는 종교적 상징은, 이미 종교의 틀을 넘어 도시를 규정짓는 문화와 역사, 전통의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를 칭송하는 것이 성(聖) 베드로를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듯, 지명은 원 명명자의 의도나 단어 자체의 의미와 무관하게 고유하기 때문이다. 지리산 문수봉, 반야봉의 위엄과 자태를 가슴속에 품는 것과, 문수보살상에 머리 조아리고 반야의 세계를 우러러보는 것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전국 각지의 불교식 도로명과 지명이 무더기로 개칭된다고 한다. 정부가 2009년 8월에 ‘도로명 주소 업무편람’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속에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특정 종교시설’이 부적합한 도로명으로 꼽혔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자신의 주소지가 신사동(新寺洞)인 것이 찜찜할까? 상식적으로 본다면 수긍하기 힘든 가설이지만, 세상에는 광신적 종교인들도 있으니 단정 짓기는 힘들겠다. 그런 이라면 지명을 탈종교적인 이름으로 바꾸자는 민원을 제기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영혼의 논리로 본다면 전국 각지의 불교식 산 이름도 바꾸자는 주장도 할 법하다. 금강산, 문수봉, 관음굴, 영취산, 두타산…. 하지만, 너무 유치하지 않은가. 그 발상이, 그런 발상을 무턱대고 좇는 행정이.
물론 이름은 다양한 명분과 필요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이 못 마땅해 개명을 신청하는 이들도 있고, 행정구역 개편 등 원인과 행정편의를 위해 지명을 변경하기도 한다. 심지어 지명의 어감이나 의미가 모던하지 않다는 이유로 주민들이 나서 지명 개칭을 청원하는 경우도 있다. 자칫 이름의 가치만 떠받들다 보면 유명론(唯名論)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이름도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름’이라는 이름이 거느린 커다란 가치를 생각할 때, 변경의 결정은 신중해야 한다. 가깝게는 주민의 불편을 조장할 수 있고 불필요한 행정 재정적 낭비를 초래할 수 있으며 멀게는 유구한 역사성을 저버리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이번 조치가, 조계종 집행부의 의심처럼 ‘대통령과 주요 권력자가 기독교인이니 차제에…’하는 식의 종교편향적 발상에 기인한 것일까. 그 정도로 이 정부가 유치할까.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비판에 앞서 유권자인 우리 스스로 낯뜨거워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설마…’하면서도 찜찜함이 남는 것 또한 사실이다. 누천년 동안 이어온 유려한 곡선의 물길을 포크레인으로 순식간에 직선화하는 정권이기에, 눈앞의 편의와 물질적 가치를 앞세운 단견의 발상과 폭력적인 추진력을 봐온 까닭에.
장맛비가 한창이다. 물 머금은 구름으로 제 몸을 가리고 섰지만 역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고, 이름 또한 이름일 뿐이다. 그걸 모르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