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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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을 살펴라

동국대 불교학술원장 인환스님


전봉준
자유기고가


인환스님을 만나기 위해 경국사를 찾았다. 경국사의 큰법당 격인 극락보전 옆 조그만 환희당(歡喜堂)에서 인환스님은 수 십 년째 머무르고 있다. 환희당 마루에는 크고 작은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스님의 책을 묶은 것인데 곧 부산 내원정사 도서관으로 보낼 것이라고 한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역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책들이다. 지금까지 만났던 스님들 중 인환스님은 가장 작은 방에 가장 많은 책을 가지고 있었다.
스님에게 3배를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경북 청송에서 올라온 것이라며 국화차를 직접 내주셨다. 스님에게 환희당의 뜻이 따로 있느냐고 먼저 여쭈었다.
“매일 즐겁고 기쁘게 살자고 지은 이름입니다.” 그래서인지 스님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팔순을 넘긴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도 좋아 보인다.
-스님의 출가인연부터 듣고 싶습니다.
“내 고향은 북한 원산입니다. 거기서 나고 자랐습니다. 전쟁 당시 1·4 후퇴 때 배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가족이 모두 오지 못하고 저만 원산항에서 묵호항으로 와 걸어서 부산까지 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습니다.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어서만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지옥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길에서 한 노보살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불쌍했던지 그 보살님이 밥을 사주면서 ‘불도를 닦아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던 때입니다. 그 보살님이 잘 생각해보라고 하고 10일후에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다시 만난 그 노보살님이 ‘학생, 결심이 됐소?’하고 물었어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냥 ‘네!’ 라고 대답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노보살님을 따라 절에 갔습니다. 그 절이 바로 부산 선암사입니다.”


그렇게 스님은 선암사까지 갔다. 당시 선암사 선원에는 향곡스님을 비롯해 석암스님, 지월스님, 석호스님(서옹스님), 홍경스님, 무불스님, 설봉스님 등 기라성 같은 수좌들이 정진하고 있었다.
불교와 전혀 인연이 없던 청년이 졸지에 출가하겠다고 절 마당에까지 간 것이다.
“내가 절에 간 날이 때마침 1952년 하안거 해제날 이었습니다. 그때 선암사 조실은 향곡스님이었는데 우연히 해제법회를 보게 되었습니다. 해제법회를 보러 작은 절에 500여 대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법거량이 벌어졌습니다.
조실스님이 법상에 올라 하는 말이 ‘창천(蒼天)! 창천(蒼天)! 누가 이 뜻을 아는가? 한 마디 일러라!’ 였습니다. 그때 30대 중반의 한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한마디를 했습니다.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자 향곡스님이 ‘안 된다. 안 된다. 그것으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 스님이 앞으로 나오더니 법상을 어깨로 밀었습니다. 향곡스님은 놀라지도 않고 꿈쩍도 안했습니다. 향곡스님은 주장자로 그 수좌의 어깨를 툭툭 때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안 된다. 그것으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젊은 수좌스님은 향곡스님에게 합장하며 인사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출가하러 절에 온 첫날 풍경이 평생 수행을 해도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으니 인환스님에게 다가온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스님은 “그 모습을 보니 이런 세상도 있구나. 나도 이 길로 가야겠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원허스님은 어떤 스승이셨나요?
“은사스님은 표훈사 주지를 하면서 소속 암자이던 마하연 관리까지 함께 했습니다. 일제시대 때까지만 해도 마하연선원에 방부를 들여야 수좌로서 인정을 받던 시절이어서 대중들이 항상 많았습니다. 스님은 그 많은 대중스님들의 뒷바라지를 다 했을 정도로 행정능력이 뛰어났습니다. 또 표훈사에 어느 누가 찾아와도 꼭 차비를 챙겨서 보낼 정도로 보시에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1983년 석암스님에게서 전법을 받으셨습니다. 석암스님과도 각별한 관계였다고 하던데요.
“내가 출가한 선암사에서 석암스님을 만났고 그 이후에도 스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석암스님에게 <초발심자경문>을 배웠고, 사미계를 받은 후에는 <사미율의>도 배웠습니다. 이외에도 <사분계율>, <사분율장> 등을 석암스님 밑에서 공부했습니다. 석암스님의 영향으로 후일 내가 일본에서 계율(戒律)을 공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석암스님은 한마디로 대중정신으로 살았던 분입니다. 그만큼 대중들을 잘 외호하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어렵던 시기에 선암사는 노장스님들에게 방을 하나씩 드렸고, 낮에는 큰방에서 정진을 하게 했습니다. 내 은사인 원허스님이 범어사에 있다가 선암사로 온 것은 선암사가 수행하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석암스님은 그렇게 잘 살았습니다.”
석암스님은 율(律)에도 정통했지만 선원에서 정진하는 수좌스님들의 모임인 ‘선림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선(禪)에도 밝았다고 한다. 인환스님은 석암스님에게 호암(顥庵)이라는 법호와 함께 법맥(法脈)과 계맥(戒脈)을 이어 받았다. 


-동국대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에 나선 이유가 있었나요?
“당시 한국에는 불교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 가서 4년간의 박사과정을 마쳤습니다. 과정을 마치고 나니 더 공부를 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붙으면 좋고 떨어져도 괜찮다’는 심정으로 도쿄대 인도철학과 시험에 응시했습니다. 운이 좋았던지 붙었습니다. 그래서 도쿄대에서 공부를 더 하게 됐습니다.”
스님은 계율의 대가이던 히라카와 아끼라 박사를 지도교수로 연구에 매진했다. 5년여 공부 끝에 스님은 ‘신라불교 계율사상 연구’라는 박사논문을 내놓았다. 스님은 “비록 일본에서 공부했지만 모국에 도움이 되고자 한국불교를 연구했다”고 전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왜 귀국하지 않고 캐나다로 가셨습니까?
“일본에서 10여년 공부를 하고 나니까 일본어를 마스터하게 됐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보니 영어를 더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외국에서 공부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캐나다로 갔습니다.”
인환스님이 한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사찰에서 영어를 공부하면 “부처님 법 공부 안하고 요상한 짓 한다”고 타박받기 일쑤였다고 한다. 당시의 기억 때문이었는지 스님은 곧바로 캐나다로 가 영어를 배우며 토론토에 대각사를 열었다. 입소문을 타고 신도들도 많이 늘어 스님은 ‘너무 재미있게 포교하고 살았다’고 한다.


-동국대에 계실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 하면 학생들에게 참선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퇴임을 몇 년 앞두고 정각원에서 학생들에게 교양과목인 ‘자아와 명상’을 가르쳤습니다. 보통 적게는 70~80명, 많게는 100명까지 듣는 수업입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학점이수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진지함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업을 진행할수록 학생들이 하나 둘 변해가는 모습을 보았고 강의가 끝날 때쯤에는 많은 학생들이 참선에 관심을 보이고 또 개인적으로 법당에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정각원 수업과 함께 불교대학원과 사회교육원에서도 참선을 가르쳤습니다. 학부 과정보다는 숫자가 적어 훨씬 가르치는 것이 쉬웠습니다. 문자가 아닌 실제로 선(禪)을 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습니다.”


-어떤 화두로 공부를 하셨나요?
“‘이뭣고’입니다. 출가 초기 석암스님이 주신 화두입니다. 선암사에서 10안거 정도를 했는데 그때 공부했던 힘으로 지금도 정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환스님은 “선암사에 살던 시절에 석암스님을 모시고 서면시장으로 장 보러 오가는 동안 궁금한 것들을 물어 많은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 시절에 먼 길을 함께 가고 오면서, 율장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석암스님이 젊은 수행 시기에 경험한 일화들을 비롯해 참선수행, 화두참구 등 수행정진에 요긴한 조언, 절집 안의 사정, 조사스님들의 법문 등 실로 다양한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때 배운바가 너무나 많았고, 초발심의 신참수좌였던 나에게 석암스님의 말씀은 마른 땅에 빗물 스며들 듯 평생의 가르침으로 다가왔습니다.”


-스님은 깨달았습니까?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나는 석암스님에게서 법(法)을 받았습니다. 법을 주고받은 도리는 말로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상적으로 얘기해봤자 쓸데없는 망상만 피우게 합니다. 전법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도리입니다. 스승의 말 한마디에 눈빛으로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스님은 “깨달음의 세계는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며 “직접 공부해서 체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불교를 세계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국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에는 세계 불교가 다 들어와 있습니다. 티베트, 중국, 일본, 동남아 불교는 물론이고 한국불교도 열심히 포교하고 있습니다. 이 중 티베트 불교가 가장 널리 알려졌고 신도수도 많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영어가 되기 때문입니다. 티베트 스님들은 인도로 쫓겨날 때부터 인도에서 현지어를 배우고 영어를 배웠습니다. 또 수행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다보니 세계 어디를 가도 ‘현지화’에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국불교 세계화를 위해서는 3대 조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영어, 둘째는 불교교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수행, 셋째는 간화선의 체계화입니다. 특히 간화선은 한국불교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일을 진행시켜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방 안에 있다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평소 순간순간, 매일 매일을 올바르게 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평생을 잘 살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서있는 이 자리를 살피면 금생(今生) 뿐만 아니라 내생(來生)에도 좋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