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경
조계종 포교사단 서울지역단 부단장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대숲 절에 계시던 어느 날 비구들과 함께 바이샤알리로 향하시다가 이월강에 이르셨습니다.
그 강가에는 오백 명의 소치는 사람들과 오백 명의 어부가 있었으며 그 어부들은 세 가지 그물을 만들었는데 크기가 같지 않았습니다.
작은 것은 이백 명이 당기고 중간 것은 삼백 명이 당기며 큰 것은 오백 명이 당겼습니다. 한편 부처님께서는 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여러 비구들과 함께 쉬고 계셨습니다.
그 때에 어부들의 큰 그물에 고기 한 마리가 걸려 오백 명이 당겨도 끌어낼 수 없었으며 근처에 소치는 사람들을 불러 일천 명이 힘을 합해 겨우 끌어내어 큰 고기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 몸에는 여러 형상의 머리 일백 개가 있었으며 나귀·말·낙타·범·이리·돼지·개·원숭이·여우·삵 등 이런 여러 가지 형상의 머리가 붙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괴상히 여겨 모두 와서 구경하였습니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도 비구들과 함께 고기 있는 곳으로 가셔서 그 고기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바로 가비리냐?”
물고기는 대답하였습니다.
“진실로 그러하옵니다.”
부처님께서는 세 번 물으셨습니다.
“네가 바로 가비리냐?”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 때에 아난다와 대중들은 그 사정을 몰라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지금 무슨 이유로 머리 백 개를 가진 고기를 불러 ‘가비리’라고 하셨습니까? 저희들을 가엾이 여겨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세히 들어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옛날 카샤파 부처님 때에 어떤 바라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황두라고 하였다. 그는 총명하고 널리 알아 그들 중에서는 많이 알기로 제일이었다. 그러나 여러 사문보다는 못하였다. 그 아버지는 임종 때에 그에게 간곡히 당부하였다.
‘너는 부디 저 카샤파 부처님의 제자 사문들과는 도리를 강론하지 말라. 왜냐하면 사문들은 지혜가 깊어 너는 반드시 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어머니가 황두에게 물었다.
‘너는 본래 총명한데 지금 너를 이길 자가 있느냐?’
‘저 사문들이 저보다 더 훌륭합니다.’
‘어째서 그러냐?’
‘제가 의심이 있어 그들에게 가서 물어보면 그들은 잘 설명하여 사람들을 깨우쳐 줍니다. 그러나 저들이 만일 제게 물으면 저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너는 왜 그들에게 가서 그 법을 배우지 않고 있느냐.’
‘그 법을 배우려면 사문이 되어야 합니다.’
‘거짓으로 사문이 되어 그 법을 다 배운 뒤에 집에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
그는 어머니의 말대로 사문이 되어 열심히 불경을 공부하더니 얼마 안지나 삼장三藏을 모두 읽어 외우고 그 이치에도 다 통달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이제는 이기겠느냐?’
‘학문으로는 이길 수 있지만 수행력으로는 질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저들과 변론하여 혹 이기지 못할 때에는 욕설로 대항해라.’
‘집을 떠난 사문에게는 아무 죄가 없는데 어떻게 욕을 합니까.’
‘그저 욕해 보아라. 너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가비리는 차마 그 어머니 말을 어기지 못하였다. 그 뒤로는 그가 변론할 때에 만일 이론이 모자라 답을 못하거나 궁색하게 되면 그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곧 욕설을 퍼부었다.
‘너희들은 미련하여 축생보다 더하다. 무슨 법을 알겠는가.’
그는 온갖 짐승 이름을 다 비유하면서 욕설을 퍼붓기를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갚음으로 지금 저 고기 몸을 받되 머리 백 개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 어머니는 지금 아비지옥에 떨어져 있느니라.
아난다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언제쯤 저 고기 몸을 벗게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현겁 동안 천 부처가 지나가더라도 벗지 못할 것이다.”
아난다와 대중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슬퍼하면서 모두 같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몸과 말과 뜻의 행은 삼가지 않을 수 없구나.”
그때에 어부들과 소치는 사람들은 모두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집을 떠나 범행 닦기를 간청하였으며 부처님은 곧 허락하시고 말씀 하셨습니다.
“잘 왔구나! 비구들아.”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들의 수염과 머리는 저절로 떨어지고 법복이 몸에 입혀져 스님이 되었습니다. 그 때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괴로움과 그것의 원인과 그것의 사라짐과 그것이 사라지는 길의 네 가지 진리와 갖가지 오묘한 법을 말씀하셨으며 그들은 번뇌가 없어지고 결박이 풀려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어느 날 파세나디 왕이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부처님, 한 가지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바라문이 죽으면 도로 바라문으로 태어나고, 귀족이 죽으면 다시 귀족으로 태어나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대왕의 질문은 한마디로 ‘사람의 운명이란 한번 정해지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단호하게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시며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인생에는 밝음과 어둠이 있고 그것은 다시 네 갈래의 길을 만들어 간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길, 어둠에서 밝음으로 들어가는 길, 밝음에서 어둠으로 들어가는 길, 밝음에서 밝음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것이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들어가는 길이란 어떤 사람이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빈궁하고 천하게 살면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악업을 지어 다시 비천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하면 그는 악으로써 악을 갚으며 뒷간에서 뒷간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이와는 달리 어둠에서 밝음으로 들어가는 길이란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둠 속에서도 몸과 말과 생각으로 선업을 닦아 훌륭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하면 그는 땅에서 평상으로 올라서고 다시 평상에서 코끼리에 올라타는 것처럼 날이면 날마다 밝음으로 상승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들어가는 길이란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몸과 말과 생각이 올바르지 못해 악업을 지음으로써 그 과보로 비천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하면 높은 누각에서 코끼리 등으로 내려앉으며 다시 평상으로 다음엔 맨땅에 그리고 마침내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 밝음에서 밝음으로 들어가는 길이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항상 몸과 말과 생각으로 선업을 지음으로써 더욱 훌륭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하면 아름다운 누각에서 나와 더 아름다운 누각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의 행동은 내일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 전생의 아주 조그마한 과보로 열반에 들기 전에 등창이 생겨 고생하셨다고 하는 내용이 전생담에 실려 있습니다. 이것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조차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행한 모든 행동은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큰 항아리를 채우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별거 아니겠지라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저지른 악행이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항상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자신을 다스리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 삼아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이 지은 업은 여러 수십억 년이 지난다 해도 없어지지 않아서 인연을 만나는 어느 순간에 자기가 지은 업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으며 그 때문에 업을 잘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장 훌륭한 업을 짓는 일은 부처님과 인연을 맺는 일이며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스승 중의 스승이시며 가장 훌륭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시기에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부처님과 업을 함께 한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업을 짓는 일입니다.
흔히 같은 시간에 공교롭게도 일이 겹쳐 일어난다는 말로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뜻의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불교경전에 있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인데 사실은 그 뒤에 ‘배가 떨어지면서 마침 지나가던 뱀의 머리를 맞추어 뱀이 죽었다’는 뜻의 ‘파사두’라는 구절로 이어집니다.
‘오비이락 파사두야’ 우연히 떨어진 배에 맞아 죽게 된 뱀은 다시 산돼지로 태어났으며 또 배에 앉아 있던 까마귀는 죽어서 꿩이 되었습니다.
이른 봄에 꿩이 양지쪽에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는데 마침 산비탈을 지나던 산돼지가 그만 돌을 헛딛고 말았으며 그 돌이 굴러서 양지쪽에 앉아 있던 꿩을 쳐서 죽이고 만 것입니다.
처음에는 까마귀가 죽어서 된 꿩을 다시 죽이게 된 것이며 다시 꿩은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 사냥꾼이 되었는데 어느 날 산에서 우연히 산돼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냥꾼이 그 산돼지를 쏘려고 하니 산돼지는 마침 근처에 있던 조그만 암자로 숨어들었으며 암자에는 지혜의 눈이 열린 도인 스님이 살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가만히 앉아 참선을 하고 있으려니 절 주위에서 죽고 죽이는 과거의 원한 관계가 뒤엉켜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도인 스님은 사냥꾼에게 가서 산돼지를 죽이지 말라고 하면서 숙명통으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서로의 원한 관계를 설명해 주었고 이야기를 듣고 사냥꾼은 마침내 발심하여 불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경전에 실려 있습니다.
이처럼 모르고 지은 업보이지만 언젠가는 그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업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세상에 험악한 일이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자기에게 돌아올 업의 결과가 두려워서라도 포악한 행동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천상계의 사람이라 하여도 복을 누릴 줄만 알고 수행할 줄 모른다면 복을 다 누렸을 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이미 사람의 몸을 받은 우리가 이 기회에 수행정진하지 않고 이 생애 동안 업장을 소멸하여 해탈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느 곳에서 이 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일체의 악을 짓지 말며 모두에게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거룩한 부처님과 가르침에 진실한 믿음으로 귀의합니다.
나무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