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선사들은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이 대화에는 나름대로의 방향성이 있다. 물론 완전하게 고정된 방향은 아니지만, 선사들 사이에 공통적인 대화의 방향이 있다. 이번 호는 선사들의 대화에 나타나는 일정한 방향에 대해서 소개하기로 한다.
저들의 대화에 나타나는 이런 방향을 이해하고 있으면 독자들께서도 스스로 선어록을 읽어가면서, 그 속에 담긴 참맛을 볼 수 있다. 독서의 참맛 말이다. 특히 선사들의 대화에는 우리들의 일상을 뛰어넘는 해학과 기지도 있어서, 독서의 남다른 맛이 있다.
첫째, 선사들은 우리들의 마음 밖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찾으려는 행동이나 생각을 매우 비판한다. 당나라시대 선사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견성見性을 강조한다. 이런 전통은 이미 『육조단경』에서부터 선명하게 드러난다. 수행자 각자마다 부처님께서 간직하신 것과 똑같은 지혜와 덕을 간직하고 있으니, 그것을 깨치라고 한다. 이런 인간의 이해는 이른바 화엄교학에서 더욱 극명하다.
당나라시대의 남종선을 전개한 선사들의 생각들에도 인간에게는 누구나 불성佛性이 있음을 전제한다. 이 점은 임제 선사도 그렇고 조주 선사도 그렇다. 많은 선사들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경향이다.
사람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나 갖추고 있는 자질이다. 이런 입장에서 선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다. 원래 어떠한 일이 있었기에, 무엇이 빠지고 부족하냐?”
즉,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고 꾸짖는다. 다시 말하면 부족한 게 없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씨앗도 결국은 자기 자신 속에 간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깨달음을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 남에게 물어서 도를 깨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점은 위에서 말한 첫째의 경향과도 연관이 있다. 깨달음이란 남에게 물어서 될 일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당나라시대의 많은 선사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견해이다. 운문 선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의 쌀 한 말(斗)을 얻으려다가, 자기 집 반년 치 양식을 잃는 법이다. 그렇게 수행을 한다면 무슨 이익이 있으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몸소 자신 속에서 체험하라는 것이다. 체험할만한 훌륭한 그 무엇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체험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 자신 속에 고유하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선승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비판이 들어 있다.
셋째, 경전에 쓰인 내용들을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외우고 남에게 전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것도 넓은 범위에서 보면 자기의 체험이 아닌 남의 것을 가지고 겉모습만 더듬는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자기의 체험이 결여되었으면, 그 말이 교학에서 왔건 선학에서 왔건 모두 비판의 대상이다. 이 점은 송나라 시대 선사들이 교학의 3장이면 무조건 모두 비난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기반성이 없이 외워대는 경·율·론 3장의 내용이란 ‘두꺼비의 울음’에 불과하다고 나무란다. 혼자 있을 때는 목 놓아 울다가, 남이 나타나면 물속으로 숨어버리는 그런 짓 말이다.
넷째, 선방에 앉아서 세상의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대화들을 많이 한다. 운문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출가한 사람이란 본래 세속을 벗어나는 데 힘써야지 거기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주지 등의 일은 모두 관례를 따르고 찾아오는 사람은 일상의 법도대로 맞이하라. 젊은 제자들은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들어 따르고, 총림에 소속된 농토나 상주물 등은 모두 본원本院의 갖가지 비용에 충당해야 하며 다른 절에 돌려써서는 안 된다.”
세속에 뜻을 두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 거의 모든 수행자들이 한 목소리로 당부하는 말이다. 그리고 총림에 소속된 상주물이나 농토를 다른 절에 충당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그저 초월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맹랑한 생각들을 비판한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선종이 처음 출현하기 이전에는 부처면 부처, 깨달음이면 깨달음, 자기의 체험이면 체험, 그런 것들에 안주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러나 선종이 출현하면서 눈 밝은 선사들은 그러지 말고 그것들을 한 단계 더 초월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니까 당시 수행승들이 ‘부처’, ‘보리’, ‘열반’, ‘선’ 등에 안주하는 것을 꾸짖는다.
그런데, 이제 선종이 전국에 퍼지다보니, 이제는 초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누구나 흉내 내어 지껄인다. 입만 열었다하면 초월이다. 이런 상황을 잘 드러내는 운문 선사의 대화 하나를 소개한다.
어떤 객승이 물었다.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도리란 무엇입니까?”
운문 선사가 대답했다.
“호떡”
그리고는 이어서 운문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을 부처라 하고 조사라 말하기에 불조를 뛰어넘는 도리를 말하는가?”
이렇게 다그쳐 묻고는 또 말했다.
“까닭 없이 허망한 망상을 일으켜서 무엇 하려는가?”
선사들은 기본적으로 초월의 경지를 존중한다. 그런데 그 초월의 경지에 다시 집착하는 것도 부정한다. 끝없는 자기 초월을 강조한다. 그것을 표현하는 단적인 말이 바로 ‘향상일로向上一路’이다. 이 말뜻은 ‘한 단계 향상된 하나의 길’이 아니다. ‘끝없이 향상해 가는 외길’이란 뜻이다.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끝없는 자기 초월의 길이다.
여섯째, 무념무상으로 쉬는 경지에 안주하는 것을 경계한다. 즉 모든 반연을 쉬는 것을 궁극의 경지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안주하는 것을 선사들은 싫어한다. 고요한 상태를 ‘묵수’하는 것을 비판한다.
일곱째, 수행한답시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선승들은 좋게 보지 않는다. 당나라시대의 선어록에는 많은 유랑 객승들이 출현한다. 직업적인 수행승들의 안이하고 상투적인 문답에 일침을 가하여 그들을 긴장하게 한다. 안녹산의 난 이후 중국의 중원이 5대代의 전란에 휩싸이면서, 먹을 게 많고 자신을 대접해주는 곳을 찾아 유랑하는 승려 집단이 생기게 되었다. 운문 선사는 이것을 아주 못마땅해 한다.
당시 수행자들이 정치적·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호남 지방이나, 중앙의 감독이 소홀한 하북 지방으로 옮겨 다니는 모습은 당시 선어록의 여러 곳에 보인다. 당시 수행승들이 이리저리 분주히 다니면서 남에게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도 비판했다. 이런 선승들에게 조주 스님은 “짚신 값 내놓아라.”고 다그치기도 한다. 수행하여 스스로 깨칠 생각은 아니하고 행각을 ‘전문’으로 하는 무리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여덟째, 눈 밝은 선지식을 친견하여 자신의 체험을 점검 받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선사들은 선배 큰스님들의 이야기(話頭)를 활용하여 상대 수행자들의 안목을 점검하곤 한다. 즉, 선배 큰스님들의 깨친 기연들을 상대 수행자들에게 들려주고는, 상대가 반응하는 것을 관찰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제도한다. 대화의 형식별로는 ‘염거拈擧’, ‘별어別語’, ‘대어代語’ 등이 있다. 이런 대화법은 운문 선사를 거치면서 송대 선승에게는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선시의 양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당대에는 볼 수 없었던 『송고집頌古集』 등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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