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8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다람살라소식
    선불교 이야기
    생활의 지혜
    고전속의 명구감상
    자연과 시
    반야샘터
    반야샘터
    반야샘터
    생활법률상식
    불서
    구룡사 한가족
    즐거움을 뿌려라
    건강한 생활

과월호보기

나의 본성本性을 잃어버리지 않는 불자佛子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군종교구장


요즘,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습니다. 지하층은 깊이 내려갈 수도 있고 사방으로 오르내리는 장엄한 법당을 짓는 그런 꿈을 생생하게 꾸고 있습니다.
불사를 하면서 주변으로는 종교용지를 더 확보 했다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뉴욕 원각사는 한국 전통사찰인데, 그 모습과는 거리가 먼 현대식 건물입니다.
그곳에는 학교도 있고 각종 복지시설과 수행공간이 두루 갖춰진 큰 절을 짓는 꿈이었습니다. 여래사가 있는 정발산처럼 둘레가 크고(3.6km) 평수가 넓은(12만평) 그런 땅입니다. 금생에 그 꿈이 실현될 것인지, 전생에 그런 꿈을 꾸다가 깨었는지, 다음에라도 그런 불사를 하겠다는 것인지, 반복해서 꾸는 꿈은 무의식無意識 상태에서도 자의식自意識으로 꿈이 되는 것은 아닌지….
선사禪師는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요,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 꿈속에서는 현실처럼 세상이 확연히 드러나더니 꿈을 깨고 보니 아무 것도 없는 무대천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그 꿈에서 깨어나려 합니다.


20여 년 전, 여래사의 불사를 시작하고 4년 후 준공검사를 마친 뒤 조계종단에 재산등기를 하려고 통도사에 내려갔을 때, 월하 노스님께서는 얼마나 노심초사 하셨으면, ‘정우는 평생 절만 짓다 죽을 건가.’ 하셨습니다.
여래사도 여래사지만 구룡사는 천막법당에서 불사를 시작했고, 신도시 아파트 단지에 포교당을 세우겠다고 하는 불사佛事에 얼마나 걱정을 하셨을까요.
‘불사에는 공짜를 바라지 말라.’ 하셨습니다. 불사금을 열심히 갚았습니다.
세상살이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대만 불광산사의 큰스님은 불교방송에서 ‘한국 돈으로 만원을 시주하면 만 배의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불자들에게 ‘성불하세요.’ 하면 이구동성으로 ‘성불하십시오.’ 그럽니다.
우리가 올린 시주금으로 살아가니까 ‘꼭 해 내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스님, 수행 잘 하셔야 합니다.’ 하는 가르침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수행修行이란 그 무엇에도 치우치거나 얽매이거나 빠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영국의 작가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행이란 깨달음의 완성이다. 그것은 죽음의 가치를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기적이고 편협한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인해서 세상살이의 힘든 일이나 어려운 일은 하지도 않고 잘 극복하지도 않습니다.


여러 번 반복되는 그런 꿈을 꾸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도 뭔가 꽃피우지 못한 씨앗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게 되면 그 분을 훗날 보살이라 합니다. ‘보살님, 보살님’ 하는 것은 보살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불하세요.’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도 산사의 정감을 느낄 수 있는 도량이 여래사입니다.
일산 신도시가 개발될 적에, 심지 뽑기로 정발산에 추첨됐습니다. 이렇게 좋은 환경의 종교용지를 다른 곳에서는 아무리 커도 보통으로 정해지는 종교용지 밖에 안 되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정해진 인연의 터입니다.


인생을 부정적으로 살면 인과因果를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 윤회輪廻를 부정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업력중생業力衆生으로 육도六道를 윤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원력보살願力菩薩이 되어서, 스스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안목眼目이 있어 어떤 말을 들어도 좌절하거나 상처받지 않는 지혜가 있어 이런 가르침을 들어도 편안하게 전해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는 것은 잠자는 것, 다만 그것뿐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이 있습니다. 죽는 것은 잠자는 것인데, 우리 불교인들이 바라보고 있는 시각은 인과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죽는 것은 잠자는 게 아닙니다. 방망이가 홍두깨가 되어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입니다. 지금보다 못한 인생살이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선업중생善業衆生으로 세상을 살면, 미래가 보장되지만 부정적으로 살면, 그곳을 향하게 되어있고 거기에는 절대로 편안한 세상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죽는 것은 잠자는 것, 다만 그것뿐이다.’ 명命대로 잘 살아가며, 열심히 살고, 여한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죽는 것은 잠자는 것, 삶이 편안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열반하셨을 때 보면 미소 짓는 입 꼬리가 올라가 있습니다.
잘 산 사람은 지금보다 낫습니다. 본전치기만 해도 인간 세상에 다시 옵니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잘 살아 원력보살이 되면, 생사윤회生死輪廻하지 않는 삶을 살기 때문에 죽는 것은 잠자는 것처럼 편안할 것입니다.
‘한 번의 잠으로 일체의 고통과 고뇌를 다 끊어버릴 수만 있다면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완성이라.’고 햄릿은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아난다여, 울지 말아라. 가까운 사람과 언젠가 한번은 헤어지게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인연이다. 한번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너는 그동안 나를 위해 수고가 많았다. 내가 떠난 뒤에도 더욱 정진하여 성인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여라.”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은 다 돌아가야 하는 길이 있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죽음이 아니고 ‘열반涅槃이요, 해탈解脫이요, 진정한 삶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바로 그러한 열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사를 할 때 ‘성불 하세요~’ 하지 않고 ‘극락 가십시다. 극락가세요~’ 하는 인사를 우리들은 극락가자고 하면 ‘어서 죽으라~’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바로 그러한 열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왜 생겼을까요. 함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잘 살아온 사람은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서움이 없습니다. 인생을 겁내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 말라. 겁내지 말라. 무서워 말라. 노병사老病死가 그런 것인데, 잘 살아온 사람은 인과를 믿고, 윤회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니,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죽음에 대한 공포의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다만 그것뿐이다.’
그러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젊음과 건강과 목숨이 소중하지만, 한없이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도나 이슬람 국가에서는 아직도 결혼을 여러 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남자가 결혼을 네 번이나 해서 부인이 네 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첫째부터 넷째 부인 가운데 누구를 가장 사랑했을까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사람은 정답을 압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사람은 그 답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자기가 첫 번째 부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욕구, 욕망, 욕심으로 네 번째 부인까지 얻었는데 네 번째 부인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섯 번째 부인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남성은 네 번째 부인을 가장 사랑하였을 것입니다.
상대가 무관심 하면 그 허물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잘 하여 그 사람에 맞춰야지, 그 사람을 향해서 손가락질로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비유설법은 무궁무진 합니다. 비유하자면, “중생들이 욕심 버리기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버리기보다 어렵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기는 놀란 들사슴 가슴에 품기보다 어렵고, 옹색한 마음은 마른 완두콩 송곳으로 찌르기보다도 어렵다.”고 하신 부처님의 비유설법도 있습니다.
네 번째 부인은 평생 너 없으면 나 못 살고 나 없으면 너 못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떠나야 할 때는 그 영감 우렁 껍질되어 둥둥 떠나가도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세 번째 부인은 ‘예 당신 가는 길에 전송은 해 드리리다.’ 했습니다. 두 번째 부인한테 갔더니 금방 함께 죽을 듯이 자지러지며 웁니다.
첫 번째 부인은 ‘좋아도 내 낭군이요, 싫어도 내 낭군인데, 당신 가시는 길에 어찌 그냥 보내오리까. 제가 당연히 따라 가야지요.’ 하였습니다.
네 번째 부인은 사대四大의 육신이고, 세 번째 부인은 나의 행적입니다. 옷깃만 스쳐도 지중한 인연이라 했던 그 인연들이 문상 와서 전송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인은 부모 형제 처자 권속 등 혈족들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부인은 다겁생多劫生에 지어온 누적된 마일리지 같은 업력業力입니다.
그 업만은 따라갑니다. 윤회하는 세상에서 우리들은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첫 번째 부인과 친해져야 됩니다. 결국 나를 따라오는 이는 그니 뿐이고 나를 생각 하는 이도 그니 뿐이니 그 본성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닦든, 참선삼매參禪三昧를 닦든, 선정삼매禪定三昧로 소중한 나의 본성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잃어버리지 말고, 나의 본성을 늘 간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asanjungw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