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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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와 기왓장의 이끼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소나기를 이끌어다가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飄風不終朝 표풍부종조
驟雨不終日 취우부종일


회오리 바람은 아침나절을
넘기지 않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않는다.


천지자연이 하는 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인간이 하는 일의 경우이겠는가 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 누군가 모두 소나기와 얽혀있는 추억은 있다. 정세훈이라는 분이 지은 한글 시 한 수를 읽어본다.


소나기


소나기 한 차례 몰고 간 뒤에
옥수수 한 뼘쯤씩 자라고 있을까
옥수수대 씹어 단물 빨던 나
잡초처럼 커온
내고향 월계리
사모님이 된
소꿉친구 여자아이
내등에 엎히어 수줍이 건너던
홍수난 시냇물은
옥수수밭 지나 산모퉁이에서
아직도 여전히 흐르고 있을까.


시골마당 빨랫줄.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하면 후다닥 뛰어가서 빨래를 걷다가 쓰러진 빨래작대기에 발이 걸리는 바람에 부딪친 발목을 부여잡고 뒤섞인 빨래들을 안고 마루로 돌아오는 풍경을 아파트에선 구경하기 힘들다.
옛 조상들은 제법 운치 있게 소나기를 즐겼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벽오동 아래에서 지은 시 한 수를 차근차근 감상해본다.


雲冒前山白雨紛 운모전산백우분
風來草木有奇芬 풍래초목유기분
北窓對榻消長日 북창대답소장일
不惜淸凉與子分 불석청량여자분


구름이 앞산을 뒤덮더니
소나기 쏟아진 후
바람이 초목에 불어오자
기이한 향기가 피어나네
북창에서 책상 마주하고
긴 여름날 보내면서
청량함을 그대와 나누는 것
아끼지 않으리라


강세황이 지인에게 준 시이다. 시를 감상하는 순간 읽는 우리에게 시공을 훌쩍 넘어 선물로 다가온다. 초목에서만 향기가 피어나는 것도 아니다. 흙마당에 소나기가 몇 방울 투두두둑 떨어지고 아직 마당 전체가 빗물에 덮이기 전에 마당전체에서 쓰리디 입체적으로 피어올랐던 흙이 뿜어내는 향기는 그 생각을 일으킨 이 순간에도 콧가를 진하게 맴돌아주고 있다. 알싸한 것도 아닌 것이 텁텁한 것도 아닌 것이 그저 한없이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곤 했던 그 마당의 흙 향기는 금년 소나기 막 내리는 즈음 몇 초 동안에도 피어나고 있을까.
흙 향기와 빗방울에 얻어맞은 나뭇잎이 피어내는 향기가 결합되면 이게 빚어내는 시너지 향기는 말할 나위 없이 머리의 지끈함을 한방에 보내버리는 효과가 있다. 그 향기에 앞산 저 너머 어디선가 뻐꾸기 울음소리라도 뒤섞여들면 후각과 청각이 행복해지면서 더불어 앞산을 바라보는 시각감각도 넉넉하게 편안해지곤 했다. 그 시절 커피 한 잔 끓이거나 녹차 한 잔 곁들여서 마셨더라면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책의 내용이 더 잘 들어왔을지 아니면 부질없게 느껴졌을지 부질없는 생각은 빨리 소나기 빗물에 씻어 보낼 일이다. 마당 위를 둥둥 떠다니던 조그만 천연물풍선. 다음 찰나에 떨어지는 빗방울에 툭 꺼져버리고 빗방울에 마당의 빗물과 부딪치면서 다시 물 풍선이 피어나고 스러지던 풍경들.
금강경에 등장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에서 포泡의 느낌을 필자는 소나기 빗방울에 마당에서 피어나자마자 스러지던 물 풍선을 떠올리면서 감을 잡아보기도 한다. 오동나무 잎에 툭툭 떨어지는 빗소리는 또 어떠했던가. 오동나무가 양철지붕 옆에 서 있기라도 해서 양철지붕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주거니 받거니 소리를 낼라치면 안 오던 낮잠이 곤하게 밀려오기도 한다. 꿈결에서 아련하게 톡톡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오래오래 전 링겔주사 줄 속으로 지루하게 떨어져내리던 기억도 아름답게 회상되려고 한다.
그 많은 산새들은 소나기가 쏟아지는 동안 어디로 몸을 피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면 허둥지둥거리는 풍경을 연출하지만 새들은 한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비가 그치면 비에 젖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여기 저기 날아다니곤 했다. 허긴 산새들은 시체도 남기지 않는다. 산새들의 숫자가 잘은 몰라도 적지 않고 수명들도 정해진 바가 있어서 매일매일 열반에 들어가는 새들이 많을 텐데 사고를 당하거나 산짐승에게 물리는 경우를 당한 새들 말고는 새의 시체를 산에서 볼 수 없다. 강이나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도 분명 자연사하는 경우가 매일 일어날텐데 오염사건이 터지는 일 외에는 단체로 물고기의 시체를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소나기에 관한 허적(許𥛚, 1563~1640)의 시 한 수를 더 감상한다.


亂風驅驟雨 난풍구취우
霑灑滿前楹 점쇄만전영
飛瀑緣詹下 비폭연첨하
流湍遶砌橫 유단요체횡
已滌炎威盡 이척염위진
還多爽氣生 환다상기생
向夕陰雲捲 향석음운권
披襟對月明 피금대명월


어지러운 바람이 소나기 몰아오더니
앞 기둥 전체를 온통 적셔버리곤
폭포처럼 처마를 따라 아래로 떨어져
여울처럼 섬돌을 휘돌아 흐르는구나
폭염을 이미 다 씻어주니
상쾌한 기운이 많이도 생겨 나네
저녁 되어 먹구름도 걷혔으니
옷깃 풀어헤치고 밝은 달 마주해 볼꺼다


도시 길을 걷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면 아 저 빌딩들이 처마를 매달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비가 그치면 그렇게 떠올렸던 생각도 빗물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버린다.
목필균이 지은 한글 시 읽는 것으로 저 앞의 한시 감상을 대신해보자.


소나기     
        
언제 누가 내게
이렇게 시원한 발자국을 남겼으리
선 채로 거센 빗발에
온전히 젖다보면
다 풀어져버릴 두루마리같은
상념들
확실한 흔적
목줄기까지 젖어오는
내안의 그리움들
떠나려간 하루는
오히려 짧다.
그나저나 고향집 처마를 덮어주던
기왓장 틈새에 피어난 이끼들은 올 여름
빗방울에도 물론 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