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9대 종정 노천당 월하대종사  
항상 연년이 공부하고 여러 가지 불사라든지 결제 등을 하는 것은 사변적으로 업에 의해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것 같으나 그 때만 지나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무상진리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고 수행자도 무상진리의 그 자리를 체달하는 것이 근본의 업이고 목적입니다.
九旬禁足成何事 / 구순금족성하사
弄得鐵牛建道場 / 농득철우건도량
三更昨夜飛身出 / 삼경작야비신출
孔孔電聲偏十方 / 공공전성편시방
구순의 금족이 무슨 일을 이루기 위해서냐?
철우를 희롱해 얻어 도량을 세우기 위해서다.
어젯밤 삼경에 몸을 날려 出하니
구멍마다 번개소리 시방에 두루하도다.
우리 중생들은 모든 형상이나 눈에 띄는 물체에만 급급하기 때문에 착상을 떠나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하는 힘이 아니면 이해도 안 되고 볼 수도 없습니다. 성현이라야 능히 성현을 보지 성현이 아닌 사람은 성현을 못 본다는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부처님의 법신이 자기 눈앞에 있으나 미혹한 중생들은 못 본다’는 것입니다. 법신을 볼 수 있는 밝은 눈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蛇出一寸 / 사출일촌
知其大小 / 지기대소
人出人語 / 인출인어
知其長短 / 지기장단
뱀이 한 치만 구멍에서 나와도
그 대소를 짐작 할 수 있고
사람의 말 한 마디로써
그의 역량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진리의 체득은 오리무중처럼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역량에 따라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진리는 똑같으나 각자의 역량은 다르므로 그 보는 이의 견해에 따라 진리의 초점을 해석하는 것도 차이가 있습니다.
一秩無影樹 / 일질무영수
無根處處生 / 무근처처생
鐵牛吼吼處 / 철우후후처
夜半一輪明 / 야반일륜명
한그루의 나무가 있는데 그림자가 없는 나무요,
뿌리가 없으면서 곳곳에 난다.
철우가 곳곳에서 크게 우는데
밤은 깊어 달은 휘영청 밝도다.
우리가 여러 가지 말은 많이 하지만 행동과 실천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마음은 한 곳에 정착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하므로 심화발명(心花發明)이 어디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심성을 깨닫고 그 경지를 비유해 놓은 게송이기 때문에 이런 법문은 우리 육감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 터득할 수 있습니다.
一秩無影樹 / 일질무영수
移就火中栽 / 이취화중재
不假三春雨 / 불가삼춘우
紅花爛漫開 / 홍화난만개
한 그루의 그림자 없는 나무를
불 가운데 심어 키우니
삼춘우를 가자하지 아니해도
붉은 꽃은 피어 찬란하도다.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서 피워지는 꽃이라야 없어지지 않고 찬란히 피어나는 것인데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지도 못하고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중생들 마음속에 업장이 두터워서 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심화발명(心花發明)이 최대라야 자기역량이 광대하며 자발력이 다양해진다. 자발력이 다소라도 미비하면 자수력을 발휘 못한다.”
마음을 화해서 이 세상을 초월한 자리를 목적으로 발휘한 역량은 광대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업장이 소멸되어 의정(疑情), 즉 의심덩어리가 크면 클수록 크게 깨달을 수 있으며 그러한 자증자력(自證自力)이 다소라도 미비하면 자기의 닦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자신의 당체를 알게 되면 모든 두려움, 배고픔, 어려움 등이 없어지고 확철대오가 되어진다고 합니다. 그런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누가 어느 정도 어느 지점에까지 도달할지는 자기의 역량에 달려있지만, 보다 알찬 정진과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