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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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식 훈련, 스파르타식 교육!

< 300 >


조 현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스파르타’라는 도시국가는 그렇게 우리의 귀에 익숙한 용어다. 강인함과 용맹성, 그리고 무자비한 경쟁과 승리주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용어다. 서열주의 입시 교육과 과열 경쟁이 전쟁을 방불케하는 21세기 자본주의 시대는 2500년을 건너 다시 스파르타식 사조가 풍미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기에 더욱 환멸스러운 그 스파르타의 용맹성이 자랑스럽게 조명된 게 영화 <300>이다.
<300>은 역사상 가장 용맹한 전사들로 알려진 스파르타의 용사들을 그린 영화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침공한 수십만 명의 페르시아 대군에 단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이 죽음으로 맞선 ‘테르모필레 전투(The Battle Of Thermopylae)’를 다룬 프랭크 밀러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 영화는 미국 영화 전체의 주말 흥행수입으로 <매트릭스 2 - 리로디드>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 이어 3위에 오른 흥행작이었다.
BC 480년이었다.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페르시아의 수십만 대군이 그리스를 침공하자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군과 700명의 테스피아인과 노예군인들만을 이끌고 테로모필레 협곡을 지킨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레오니다스 왕에게 항복을 권유하지만 레오니다스의 결전의 의지는 막무가내다. 이어 3일간 협곡을 피로 물들게 한 전투가 벌어진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군의 남하가 지연되는 사이 그리스 함대는 무사히 퇴각한다. 레오니다스 왕을 비롯한 300명의 스파르타 군 모두는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했지만 그들은 그리스의 영웅으로 추대된다.
<300>에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의 대척점엔 페리시아왕 크세르크세스가 있다. 그리스의 침공을 계획하는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10년 전 선왕의 마라톤 전투에서 패했던 복수를 하려 한다.
그런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에 맞서서 그리스에서는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항하려고 한다. 이에 바다에는 전략가인 데미스토클레스(랄프 리차드슨)가 이끄는 전함이, 육로에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일당백의 병사들이 적군을 맞이할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부패할 대로 부패해 적군의 뇌물이 놀아나는 스파르타 신전의 사제들의 농간에 의해 군 출정이 거부되고, 결국 레오니다스 왕은 정예부대 300명만을 데리고 출정한다.
이 300명의 일당백 장수들이 협곡전투를 통해서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를 물리칠 기세가 전개된다. 그런데 스파르타에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스파르타인 곱추에 의해 스파르타군의 요새로 통하는 길이 적군에 알려지면서 스파르타군은 고립된다. 하지만  레오니다스 왕은 데미스토클레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각하지 않고 남아서 그리스군이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최대한 벌어주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일당백이 아닌 일당천의 싸움을 벌여 장렬히 전사한다.
테르모필레 전투가 유명한 전투이고 숫적으로 절대 열세인 병사들이 대군을 맞이하여 장렬히 전사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기록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좀 더 영화를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한 과대 포장이 많았다고 한다. 붉은 옷을 입고 용맹스럽게 진격하는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적에게 피흘리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붉은 천으로 옷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절대 불리한 숫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과 싸워 장렬히 전사하여 자신을 던진 전투는 우리에게 상당히 낯익다.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으로 왜적에 대항한 ‘조헌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700의사’의 이야기가 그랬다.
조헌장군과 영규대사는 불과 700명의 의병과 승병들로 절대적인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왜적과 맞섰고, 전원 전사했다.
인간은 가치를 추구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인해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거나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자신의 민족과 종교와 가족을 위해 기꺼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내놓기도 한다.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기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불교의 이차돈 성사가 그랬고, 많은 승병들이 나라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 <색계>라는 영화에서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을 한다는 대의명분 하에서도 개인을 보듬어주지 못하고 대의명분에 이용만 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에 대해서 얘기했듯이 대의명분하에 인간이 소외되어선 곤란하다.
스파르타는 늘 최강을 지향했기에, 장애인과 약자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한 장애인도 조국 스파르타를 위해 자신도 싸울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지만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은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결국 그 장애인을 받아들인 것은 적국의 왕 크세르크세스였다. 그래서 이 페르시아왕의 설득으로 인해 곱추 스파르타인은 스파르타군의 요새로 가는 샛길을 알려주었고, 정예군은 궤멸하기에 이르렀다.
스파르타의 용맹성을 찬양할 수는 있다. 그들은 최강자를 지향했지만, 최약자를 보듬지 못해 결국 패배의 아픔을 맛봐야 했던 것이다.
그 사회의 성숙도는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다루느냐를 보면 알 수 있다. 우성인자만을 남기고 열성인자를 파괴하는 실험실처럼 인간을 다루는 사회는 소수 강자의 행복만을 보장하는 사회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한 일성은 모든 중생이 부처라는 평등 선언이었다. 서양에선 일찍부터 신체적 조건을 비롯한 몇 가지만으로 우열을 갈랐지만, 불교의 관점에선 그가 어떤 생김새를 가졌건 그는 부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브라만과 크샤트리아와 바이샤와 수드라와 불가촉천민으로 차등을 두어 차별했던 흰두교의 관점과는 근본이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그렇게 차별 받은 인간들을 천상천하유아독존인 부처님으로 추켜올려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모든 동물과 유무정의 영혼들까지 구원했다. 그것이 불교의 세계다.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시대는 다시 스파르타와 다름없는 비열한 적자생존과 우열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그런 경쟁 시스템의 세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스파르타의 곱추와 다름없이 자본주의 도태아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감수해야하는 게 현세다.
<300>명의 전사는 위대했다. 하지만 붓다가 300명과 조금도 다름없이 위대한 본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언급했을 첫 번째 인물은 바로 그 곱추였다.
<300>명의 전사만이 추앙받는 시대에 불교는 과연 한명의 곱추를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