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필자는 금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을 교재로, 시민들을 위한 무료공개강좌를 열었다. 매주 금요일 오후 7~9시 사이에 두 시간씩 7월과 8월에 모두 8주간을 강의하였다. 필자가 몸을 담고 있는 연세대학교 당국은 무료로 강의실을 빌려주었다. 그것도 시설이 잘 된 고급 강의실을 말이다. 인문학의 전통이 오랜 연세대학교의 정신이 여전히 오늘에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사례이다.
청강하는 분들의 구성을 보면 여러 방면에서 골고루였다. 불교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과, 선불교를 전공하는 학자들과,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분들과, 젊은 대학생에서 나이 많으신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선착순으로 40명을 접수받아, 끝나는 날까지 높은 출석률로 진지하게 회향했다. 강사로 나선 필자 또한 공들여 강의를 했다.
그러면 『고존숙어록』이란 어떤 책인가? 간단하게만 소개하기로 한다. 이번에 강의한 『고존숙어록』은 여타의 전등서傳燈書, 예컨대 『조당집』이나 『경덕전등록』, 『오등회원五燈會元』에 실리지 않은 내용들이 상당히 많다. 게다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오등회원』(1252년)과 상호 대조하면 서로 보완되는 점이 적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고존숙어록』은 『오등회원』 보다 개별 선사에 대해 할당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한 인물의 가풍을 파악하는 데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북송을 지나면서 편집되기 시작한 『설두송고』와 『벽암록』 또는 『종용록』 등에서 보여주듯, 중국의 선 문헌은 당대唐代 시詩 문학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때문에 『고존숙어록』은 이런 일련의 연장선에서 선문학禪文學 자료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존숙어록』의 고형固形이 있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고, 이를 증보해 1267년 복건 지방에서 유통본 형태로 중각重刻한 것이 분명하다.
2.
이 책을 강의하는 데, 하루는 어떤 대학원생이 이런 질문을 했다. 그간의 강독에 참여했고 또 스스로 『고존숙어록』을 읽어보았는데, ‘선사들은 부정하는 말로 일관하는데, 왜 그렇게 부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면서, 필자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이 질문을 받고 보니, 이 문제는 그 학생만의 궁금함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 집중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소견을 드러내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문헌자료와 논리적 증거를 가지고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다 할 수는 없고 핵심적인 것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선 문헌을 접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선사들의 ‘부정하는 말’을 접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선사들은 모든 생각을 쉬라고 한다. 말로 설명을 해달라고 하면 말로 할 수 없다고 한다. 입을 여는 순간 진리와는 멀어지고 집착에 떨어진다고 한다. 문자에 의존하지 말라고 한다. 이거냐고 물으면 그게 아니라고 한다. 그거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이런 궁금함을 이해하려면, 대승불교를 이해해야 한다. 그날 무료강좌 시간에도 말했지만, 선禪이 대승불교의 범위에 들어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위 학생의 질문은 불교 중에서도 ‘인식’ 내지는 ‘지식’의 문제와 연결되어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원천적으로 모든 인식과 지식은 언어와 사유와 연관되어있다고 한다. 언어와 사유를 떠난 인식이나 지식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좀 어렵거나 지루할 수 있으나, 좀 참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이 문제를 이해하면 불교의 교리가 좀 더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인식이나 지식이 이루어지려면, 첫째는 인식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인식 기관들을 ‘근根’이라고 한다. 둘째는 인식의 소재거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소재거리를 불교에서 ‘경境’이라고 한다. 셋째는 활성화된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불교에서는 ‘식識’이라고 한다. 이상의 근-경-식, 셋이 화합해야 우리들의 인식이나 지식이 성립 가능해진다. 물론 이 셋은 당연하겠지만 한 순간도 고정됨이 없이 찰라찰라 미세하게 변천한다.
예를 들어보자. 첫째로 ‘근’으로서의 내 눈이 있고, 둘째로 인식의 소재거리 즉 ‘경’으로 신호등이 있고, 셋째로 활성화된 의식으로 안식이 작동하고 있고, 이 셋의 ‘만남’이 있어야 비로소 ‘저기에 빨간색이 켜진 신호등이 있다’라는 지식과 인식이 성립한다. 이 셋 중에 어느 하나만 작동이 안 되거나 변형이 있어도 지식이나 인식은 ‘옳음’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4.
자, 그러면 선사들이 부정적인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이유에 대해서, 불교인식론의 입장에서 대답해 보기로 한다. 위에서 필자는 인식의 성립을 위해서는 셋째 조건인 ‘의식의 활성화’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내가 대상에 주목하고 있지 않으면, 밖에서 난리굿을 해도 소리가 안 들린다. 대상에 주목하는 것도 일종의 ‘의식의 활성화’ 현상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식의 활성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문제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는 수많은 기억들이 들어있다. 이런 기억들을 불교인식론에서는 ‘종자種子’라고 부른다. 종자를 땅에 심고 물주고 햇빛을 쏘이고 알맞은 인연들이 다 모이면 드디어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 우리의 지식이나 인식도 그렇다.
‘종자’가 생장을 향해 움직이기 위해서는 ‘외적인 자극’이 있어야 한다. 위에서 말한 ‘경’은 ‘종자’의 발아를 위한 자극의 일종이다. 물론 내 의식이 그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상에서 필자가 한 말을 다시 반복해서 잃어보면, 독자들은 필자의 말이 순환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객관적인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 만들어 놓은 대상에 대한 생각’을 인식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참된 인식에 도달할 수가 없다. 우리들의 인식에는 ‘태생적으로 선행된 지식’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것의 부정적인 측면을 ‘선입견’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눈앞에 벌어진 ‘고-스톱’판에 ‘쌍피’ 면하려고 ‘껍질(=피)’에만 주목하다, 상대방이 ‘5광’ 나는 줄을 모르는 격이다.
대상으로, 의식의 소재거리로, 향하는 활성화된 의식을 쉬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또 모순이 생긴다. 필자는 위에서 지식이나 인식은 ‘근-경-식’이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때문에 ‘식’을 쉰 상태에서 만들어진 지식은 엄밀하게 말하면 지식이 아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혜’라고 이름 붙인다. ‘알아야 할 대상’이 ‘알고자 하는 나의 의식 활동’에 오염되거나 굴절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에게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는 생각마저도 쉬어야 한다. 선사들이 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식’이 아닌 ‘지혜’를 몸소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5.
그러면 쉬면 다 되는가? 그렇다. 이 지점에서도 역시 선禪이 불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도 대승불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승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은 원천적이고 항상 깨어있고 도덕적으로 청정하다고 한다. 이것을 문자를 써서 ‘청정본각淸淨本覺’이라고 한다. 이런 마음의 존재 양상을 또 문자를 써서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한다. 공空하면서도, ‘적寂’하면서도, 신령스러운(靈) 지각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선사의 사상도 이런 대승불교의 심성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마음을 경전에 따라 ‘진여’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진여’에는 불변하는 속성도 있고 인연을 따라 변하는 속성도 있다. 이런 ‘진여’에 외부로부터 들어 온 번뇌가 장애질을 한다. 중생들의 마음은 이렇게 ‘진여’와 ‘번뇌’가 쉼 없이 작용한다. 쉬면, 우연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은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진여만 남고 번뇌는 사라진다. 물론 진여에는 불가사의한 여러 업의 작용이 있다. 대표적으로 ‘자-비-희-사’의 네 가지 무량심이 깃들어 있다. 그 넷 중 대표적인 것이 자비이다. 자비가 드러나면 수행이 잘 되어가는 것이다. 선사가 쉬라고만 하고, 일상생활에 자비가 들켜지지 않으면 그것은 ‘땡초의 말장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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