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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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라 하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군종교구장


인생人生은 나그네 길이라 하였습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만나고 있는 다반사茶飯事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마치 손수레를 끌고 가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에 가고 있는 인생입니다.
이런저런 생각도 하여 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그런 일들과 만나야 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이런 일들을 헤쳐 나가야 되는 것일까….
그러다 살아온 시간들을 들여다보니 손수레를 끄는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혼자 무거운 등짐을 지고 가는 지게꾼 같은 인생으로 내 몰리고 있습니다.
사찰에서는 목도채를 메고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석공이나 목수들이 무거운 돌이나 나무를 옮길 때 여러 사람들이 짝을 지어 목덜미나 어깨에 메고 가는 긴 나무 막대기를 말합니다.
요즘은 건물을 짓는 공사장에는 중장비로 들어서 얹고 세우고 있지만, 과거에는 이런 일들은 모두 목도꾼들이 힘을 합해서 옮기기도 하고 세우고 걸치기도 하여 절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힘을 모으면 한 채의 집이 지어지기도 하고 법당도 세워지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집을 짓거나 불사를 하는 곳에서는 서로가 힘을 합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가정사도 그렇습니다. 가족들이 합심해서 목도하듯 서로의 힘을 모아 살아가면 아무리 힘든 일도 힘든 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집안의 힘든 일을 한 사람에게만 지우게 하면, 짐을 짊어진 사람은 몸을 다치거나 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겁고 힘든 일들은 힘을 함께 나누는 목도를 하는 것이 불사현장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서로가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보조를 맞추어서 힘을 모으는 목도꾼의 지혜에 우리 불자들은 신심과 원력으로 동참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출가한지 50년, 구룡사에서 불자들과 30년을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근기가 수승해서가 아닙니다. 함께 했던 불자들의 신심과 원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짊어진 등짐이 아니라 불사의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일들을 함께 했던 불자들의 목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목도꾼의 어울림 속에 보람도 있었고, 신명나는 일들로 힘든 줄도 모르게 삼십 여년의 불사는 회향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승가공동체의 자랑스러운 일들입니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들리지 않던 법당의 에어컨 소리도 입추가 지나니 귀에 거슬리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이렇게 뛰어난 적응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민감하게 들려오는 잡음의 소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기억들이 한두 가지는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해 주면서 나에게는 왜 못할까. 다른 사람에게는 친절하면서도 나에게는 불친절 할까.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면서 왜 나만 미워할까.’
젊은 시절의 기억들을 떠올리다 보면 그런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나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할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들입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미워하지 않으니 사랑할 것이라는 생각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살다보면 행복해도 고통과 괴로움이 있을 수 있고 행복하지 않아도 고통과 괴로움이 없을 수 있습니다.
‘지옥도 한 세상’이라 하였습니다. 지옥이라는 세상을 생각해 보면 고통과 괴로움이 떠오르겠지만, 그곳도 세상은 세상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오탁악세五濁惡世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목도꾼의 조화로움이 생기면 아무리 큰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살菩薩은 세 가지 일이 있는데, 스스로 발심發心해서 하는 것이 으뜸이요, 스스로 실천하는 사람이 보살입니다. 다른 이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는 일들을 보살행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상대방이 원해서 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가르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얼마 전, 군軍에서 활동하는 스님들과 북인도 히말라야 순례길,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 존자님을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달라이라마 스님을 뵙는 순간, 많은 대중들은 자신과 스스로 교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 시대에 함께 살았던 대중들은 얼마나 행복하였을까요.
달라이라마 스님만 뵈어도 많은 대중들이 그 온화한 미소에 신심이 저절로 나고 틱낫한 스님의 자상한 가르침에 대중들은 환희심으로 업장이 소멸된다하니 그 스님들의 수행 덕목은 얼마나 크고 수승한 것일까요?


불자佛子라면 네 가지 선행善行을 갖추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가르침을 아무리 들어도 싫증내지 말아야 하고.
두 번째는 바르게 관찰하고 사유할 줄 알아야 하며.
세 번째는 가르침을 따라 능히 실천해야 하고.
네 번째는 진정한 깨달음으로 회향해야 합니다.


20명의 스님들과 달라이라마를 친견하였을 때 스님께서는 유럽에 한 독지가가 1억불(1,200억 원)을 드릴 테니 서양에 불교센터를 세우시고 유럽 국가에 불교를 전하는 불사에 써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존자님께서는 이를 정중히 사양하고 거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구룡사에서 불자들과 함께한 시간은 그렇게 30년이 되어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중에 손가락에 꼽히는 시간들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나가버렸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시간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세상을 살아온 것처럼, 이렇게 떠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다시 이 세상에 올 것입니다.
내가 오십 쯤 되었을 때, 내 나이를 부채살 접듯이 반절만 접을 수 있다면 스물다섯, 출발점을 어디로 삼을까. 아쉽고 미진하고 부족했던 시간을 출가자의 길에서 후회 없이 사는 인생이 되도록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이젠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더 산다고 해도 60대 중반인 내 나이보다 살아갈 날은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20~30년 지나가는 시간도 잠시잠깐 이었는데, 앞으로 남은 시간의 십년 이십년은 불확실한 시간들인데, 그 시간들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 뒤에 후회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남은 인생을 소중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이디스 머독이라는 작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은 때때로 슬픈 얼굴로도 다가온다. 나의 행복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너무 슬퍼서 오랫동안 그것을 불행인줄 알고 내던졌었다.”
행복은 때때로 슬픈 얼굴로도 다가오는데, 너무 슬퍼서 그것을 불행인줄 알고 내던져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그것도 행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신不信에서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랑은 미움에서 멀리 있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의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며 기쁨은 항상 눈물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법당을 세울 때 목도를 보았습니다. 시장에서 짐을 메고 가는 지게꾼도 보았습니다. 짐자전거에 실어 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토바이와 트럭에 가득 짐을 싣고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다변화 되어가는 세상의 일들이 하나씩 이해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도 자연스러운 목도꾼의 힘을 보태는 불사현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나를 소유하지 못하는데 누가 나를 소유하고, 내가 나도 소유하지 못하는데 무엇을 소유할 것이 있어 목말라 하겠습니까. 어렸을 적, 우리네 어머니는 비 오는 궂은날이면, 툇마루에 앉아 시장터에서 사온 실타래를 한 올씩 풀면서 지나온 시간들과 다가오는 시간들을 교차시키는 그런 지혜를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이제 모든 곳에서 많은 일들을 내려놓으려 합니다.
우리네 어머니의 지혜로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내려놓고 떠나려 합니다.
 
asanjungwoo@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