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내 나이 여섯 살에 고향을 떠난 이후 난민이 되었지요. 이곳 제 2의 고향 인도에 터전을 꾸리고 우리 티베트 고유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불교 지식을 유지함과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유를 실현케 해준 인도 정부와 국민의 관용에 감사를 드립니다.”
인도의 광복절 또한 우리와 같은 8월 15일이었다. 인도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 70주년을 기념키 위해 영국 왕실을 상대로 과거 동인도회사가 강탈해간 105캐럿(시가 2억 원) 상당의 다이아몬드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왕관 십자가 정 중앙을 장식하고 있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인도 무굴제국 당시의 것으로 현재 대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947년 독립을 기점으로 하여 힌두와 시크교도는 인도로, 무슬림은 파키스탄으로 각기 분리되었다. 비폭력 운동을 펼친 간디의 실천에도 불구하고 힌두교를 대표한 네루와 무슬림을 대표한 진나에 의해 생이별을 하기에 이른다. 하나의 민족은 결국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70년을 흘러왔다. 오늘의 인도는 성대한 잔치로 독립을 기념하지만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달라이라마(뗀진갸초, 81)는 과거 티베트에서와 같은 격동이 종식되지 않고 지구촌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는 현실에 큰 문제의식을 비췄다. 더욱이 오늘의 시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사에 대한 아픔을 감추지 못했다. 인류가 지녀야할 보편적인 인권과 평등에 대한 인식의 부재는 나와 타인을 더욱 분리시켰고 극단적인 비극을 초래했음을 비판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충돌은 해답을 구하지 못한다고 당부하는 달라이라마. 티베트가 난민의 신분이 되어 그들의 아버지의 땅으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가능성을 인정해 왔다. 그러한 비관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정착한 새로운 땅에 평화의 뿌리를 내리고 새로이 재건된 티베트의 역사로 다시 복원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불교의 수행자로서, 티베트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인류의 한 인간으로서 본인을 수식하는 달라이라마. 공동의 인간 가치를 보다 보편적으로 접근하고 증진시키는데 기여하겠다는 삶의 과제를 실행하고 있다. 이를 실현키 위한 목적으로 달라이라마는 오늘도 전 세계의 교육자와 과학자 그리고 정신분석학자는 물론 각계 종교 지도자와의 만남을 주선함과 동시에 본인 스스로 참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불교란 삼보를 귀의처로 삼아 인과의 도리를 알고 이를 인정하며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헤아려 실천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수행하는 이라면 연기의 이유를 다양한 이치로 사유하면서 대상의 근거를 파악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보이는 것에 대해 현상이 공하다고 하는 것은 단견(딱타)을 끊는 것이 됩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분별로 말미암아 탐심과 진심이 일어남을 알아차리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공성입니다. 월칭보살의 현구론에 근거한 총카파 대사의 보리도차제론 관품에서는 이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공성을 깊이 이해하고자 한다면 자립과 귀류의 논증을 철저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미세한 아집까지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는가. 가장 먼저 경전을 통해 스스로 사유하고 선지식이신 논사들의 견해와 비교 구분하면서 본인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반야부의 주제인 공성에 대한 체계를 확립한 분이 용수보살입니다. 더불어 미륵보살의 현관장엄론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성에 대한 용수보살의 견해가 스스로 적립이 되었다면 이어서 무착보살께서 밝히신 유식의 견해를 비교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티베트불교는 논리와 대론의 방식으로 수행자의 근기를 시험합니다. 듣고 사유하는 힘을 키움으로써 진정한 배움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첫 대론 수업은 난민의 정착지인 마수리에서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처한 상황이 워낙 열악했던 탓에 막상 그 논리 수업에 큰 비중을 두지 못했습니다.
현존하는 경과 논을 단지 말씀이 좋다고 무작정 믿는 오류를 범하지 마십시오. 산스크리트어와 파알리어 그리고 중국어를 저본으로 한 다양한 논서의 대부분은 불교의 인식론과 인명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단지 읽고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만 말고 이를 어떻게 응용하고 현대화 시킬 수 있는가 고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로지 믿음으로서만 수행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속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직면하며 겪어가는 마음의 작용들이 실질적으로 증명되고 논리화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에 대한 자긍심이 있는 이라면 그와 동시에 나의 행동이 어떻게 가족과 어울리고 공동체와 병행되어져야 하는가에 신중해야 합니다.
허물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모든 해답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천성이 어떠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오늘의 지구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파괴 등을 비추어 보면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인간의 본성은 사랑과 자비 그 자체입니다. 단지 환경에 의해 그 성품이 오염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좀 더 평화롭고 윤리적이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희망의 21세기가 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대상을 누리는 실체의 주체는 무엇인가. 외경은 진실 되지 않은 허구인가. 마음, 그 근원의 감정은 과연 진실한가. 일체의 제법이 무자성이라면 제법이 없는 것인가. 세상의 모든 것이 허상인가. 실제적인 기능이란 없는 것인가.
여기 내 앞에 꽃이 있습니다. 보이는 대로 인식이 되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헤아립니다. 세간인은 이를 환으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불교를 수행하는 이라면 그 대상이 우리가 보는 대로 다시 말해 보여지는 대로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차립니다.
석가모니 붓다께서 초기에 설하신 무아법은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거스르는 혁신적인 논리였습니다. 바라나시 사르나트에서 가립 된 오온과 다른 상일주제의 실체적인 나는 없음을 네 가지의 고귀한 진리로서 논하였습니다.
여기 고통 받는 ‘나’가 있습니다. 이는 상호 의존된 과보입니다. 악한 조건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고통 받는 결과는 없었음을 알아차립니다. 감각적인 행복 또한 같은 논리입니다. 무아의 지혜로써 수승한 차제의 도리를 따라 괴로움의 근원적 기반인 무명을 멸할 수 있습니다.
윤회란 행고입니다. 세상의 모든 중생이 괴롭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는 실제적인 괴로움이 아닌 착각입니다. 일시적으로 내가 생계를 연명키가 어려워 겪는 불행을 두고 괴로움이라고 이름 지을 수 없습니다. 마치 내가 겪는 현재의 어려움이 가장 큰 고통인 것인 냥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는 번뇌의 거칠고 미세함을 파악하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화를 쉽게 일으키는 이를 쉽게 봅니다. 이들을 보면 남 탓도 잘합니다. 의식의 대상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것은 실상을 바로 사유하기 위함입니다. 실상을 알면 화를 낼 일이 없습니다. 이 사유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계, 정, 혜 삼학이며 사성제의 도제입니다. 언제나 문제의 핵심은 ‘나’입니다. ‘자성’의 실체 그 이면을 파헤치면 인류가 보편적으로 겪는 현안의 대안을 유출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당신을 봅니다. 한 인간을 바라봅니다. 인식을 통해 진실 되게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뿐임을 사고합니다. 대상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마치 환영과 같다고 사유합니다. 존재하지만 실제 하지 않음을 분석합니다. 단지 명칭으로 이름이 지어진 것일 뿐임을 알아 갑니다.
유정이 존재하지 않으면 과연 누구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말입니까. 유정이 없다면 결과는 누구의 것이 됩니까.
실체를 규명했을 때는 존재하는 바가 없음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인무아의 측면에서 생성과 동시에 소멸하는 바에 대한 논의는 상위 단계의 수행법입니다. 때때로 저 스스로가 진실한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문할 때가 있습니다. 면밀한 논증의 방식으로 짚어 간다고 말꼬리를 잡아 이어가다 보면 문득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 의제를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저물어가는 20세기의 인물임을 반증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며 ‘하하하’ 웃습니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가연숙 (보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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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교. www.gagy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