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9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다람살라소식
    선불교 이야기
    생활의 지혜
    고전속의 명구감상
    자연과 시
    반야샘터
    반야샘터
    생활법률상식
    불서
    구룡사 한가족
    구룡사 한가족
    즐거움을 뿌려라
    건강한 생활

과월호보기

장거리 마라톤 결승 테이프를 끊다

간옹艮翁
조계후학


진실을 왜곡하지 말자. ‘가사 입은 도둑’ ‘지옥 찌꺼기’라는 말이 『선가귀감』에 나온다. 오랫동안 무려 4세기가 넘도록 겉모양과 음서에 속아 바보짓을 한 ‘나’ 아닌가? 『금강경』에 있듯이 색깔과 소리로써 부처를 찾는 것은 분명 사도邪道라 할 수 있다. 이제는 다르다. 능엄의 ‘오음마五陰魔’를 극복해야만 한다.
6조 스님께서 수좌에게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하고 물었는데 8년 동안 모르다가 비로소 깨쳤다 한다. 선가에서는 ‘부처가 오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오면 조사를 죽인다’ 한다. 그러데 객진客塵의 번뇌마가 버젓이 주인노릇을 한다면 이것은 문제다. 그래서 ‘이 뭣고?’ 하고 화두를 잡는다.
내 인생의 주인공, 나의 삶을 노 저어가는 선장은 나 이외에 있을 수 없다. 숫타니파타의 외길,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당당한 길이다. 부처님도 8만4천의 마군을 조복 받고서야 비로소 성도成道를 했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도 틈을 노리며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마성魔性에 지지 않고 대장부가 되기 위해서 선禪의 길을 걸어왔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이제 감히 선언하고 싶다. 공空이다. 면벽한 노승의 눈매에 미소가 돌 듯, 나 자신도 오래도록 흙덩이 좆는 개처럼 허덕이다 이제야 사람 무는 사자처럼 포효咆哮를 한 것 아니겠는가.
참으로 멋진 오늘이다. 이로써 부처님 은혜를 갚고 더 이상은 일 없이 한가한 사람이 되고 만 셈이다. 그간 왜 그렇게 힘이 들었던 것일까? 논에 자라는 벼와 피를 가리지 못하고 그저 의기양양하게 더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지낸 꼴이다.
아닌 것은 바로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데 왜 나는 철부지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공성空性에 눈뜨고 진공묘유眞空妙有를 얻었으니 반갑기 그지없다.
집에 든 도적을 자식처럼 오냐오냐하며 같이 지낼 수는 없다. 손님은 바라보며 맞이하지만, 도적은 몽둥이로 쳐서 내쫒아야 한다.
부처님 법 만나기가 어렵다 한다. 부처의 미소 또한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그만큼 애를 써서 깨닫고 보니 과연 저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절 공부도 교敎를 버리고 선禪에 드는 바, 이는 알음알이가 아니다. 말길이 아니라 심법心法이다. 수미산이 아무리 높은들 허공만 하겠는가.
달은 이미 보았는데 손가락 끝이 무슨 소용이랴. 그냥 허허 웃고 말 일이다. 호랑이인줄 알았는데 고양이더구나. 별 볼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도를 깨친 달사達士에게 도를 물어도 가르쳐주지를 않는다. 이는 직접 깨달아야 알지 도저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밥도 뜸이 들어야 먹듯이 아무리 끓어도 더 기다려야만 한다. 해서 백번 들어야 한 번 보는 것만도 못하고 백번 봐도 한 번 맛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허울만 그럴듯한 빛 좋은 개살구를 무엇에 쓰겠는가. 그냥 관자재觀自在다. 국량局量이 작은 마누라가 아무리 바가지를 긁어도 사내가 큰 고함소리 한 번이면 끝이 나듯 참사람은 결코 삿된 것에 갇히지 않는다.
장안에 이르니 전국이 다 손안에 들어온다. 매화를 보니 봄소식이요, 심공心空하여 고향에 돌아가니 의젓하기 한량없다.
이 공부하는 사람이 거짓은 있을 수 없다. 본인의 시절인연과 경계를 법계法界에 삼가 고告하는 바, 이는 작은 불사가 아닐 수 없겠다.
모든 것 일체 회향廻向하는 바, 동업同業의 절 식구에게 작은 빛이 되기를 바란다. 무서운 뱀 무리가 아니고 썩은 새끼줄인 것을 더 이상 무엇하랴. 하늘의 별이라도 딴 듯 하지만 평상심이다. 누가 묻거든 말없이 차나 한 잔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