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 보
    공정한 사회를 위하여 1
    공정한 사회를 위하여 2
    공정한 사회를 위하여 3
    선지식을 찾아서
    무소유의 삶
    지상법문
    즐거움을 뿌려라
    절문밖 풍경소리
    붓다 칼럼
    취재현장에서 본 불교
    건강한 생활
    입시광장
    치아건강 칼럼

과월호보기

공정한 교육이 가능하겠는가!

위행복
한양대학교 중국학과 교수


옛날 은(殷) 나라의 임금 자리에 있던 주(紂)가 상아 젓가락을 쓰겠다고 하자 신하들이 크게 걱정했다. 상아 젓가락을 고집하는 행위의 결말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상아 젓가락을 쓰는 사람은 무소뿔이나 옥으로 만든 그릇에 담긴 산해진미를 먹으려 할 것이고, 화려한 옷을 입고 고대광실에서 살려고 할 것이 뻔했던 것이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주(紂)는 결국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한 생활을 했고, 사람을 숯불에 태워 죽이는 포락지형(   烙之刑)을 자행함으로써, 주(周) 나라의 무왕(武王)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사소한 일 한 가지로 먼 미래의 대사(大事)를 예측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행정고시 선발 인원을 줄이겠다던 정부의 방침이 여론의 반대에 부딪쳐 백지화된 것이 바로 이런 원리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전문 역량을 갖춘 인재를 발굴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뭐 나쁘겠는가만, 국민들은 관료주의에 찌든 모 부처 장관의 구태의연한 행태를 보고서는, 그래도 고시(高試)가 공정한 방법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을 파악함에 있어 ‘역사적 경험’이 판단의 일차적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렇다면 현 정부는 교육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 왔는가?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보건대, 이명박 정부에게는 ‘공정한 교육’의 실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며, 그 단적인 예가 자립형 사립학교의 확대이다. 자립형 사립학교는 학교별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등등의 방법으로써 학생이나 학부모의 요구에 부응한다는 목표를 앞세우고 있는데, 정부의 공적 지원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높은 학비가 책정될 수밖에 없으며, 보통의 경제적 능력을 가진 부모를 둔 학생들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자립형 사립학교’라는 말 속의 ‘자립’은 ‘자립’이 아니라, 소수만이 교육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오만한 배타’일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절제’와 ‘배려’가 필수적이며, 이는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타인의 절제와 배려가 있어야만 내가 자유로울 수 있듯이, 소수의 방만한 횡포가 용인되면 다수의 자유는 보장되기 어렵다.
모든 학부모는 자신의 자녀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립형 사립학교 등에서 공부할 수 없을 것이니, 일반 고등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흔히들 교육을 국가의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하는데, 이 말 속에는 교육이 한 나라의 장래를 가름하는 중요한 분야인 동시에 ‘공공(公共)의 재화’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교육’이라는 분야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나라가 그 일차적 주관자가 되어야 한다. 개개의 인재들이 갖춘 역량의 총화는 국가사회의 것이므로, 이른바 “수익자 부담”이라는 말로써 학부모에게만 교육비 부담을 전가해서는 안 되며, 국민교육의 비용은 기본적으로 나라가 부담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우리는 중학교까지를 의무교육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미국 및 유럽의 선진국들은 고등학교 과정까지를 의무교육으로 책정하고 있다. 민주시민의 소양을 갖추기 위해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한 것이고, 공평하고 보편적인 교육을 나라가 책임지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예산을 늘려 일반계 고등학교 전체가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공정 사회”로 가는 방법이다. 자립형 사립학교의 확대는 교육의 불평등과 불공정을 더욱 심화시키며, 우리 공교육의 문제점을 미봉(彌縫)하거나 호도(糊塗)하는 편법일 수 있다.
요즘 거론되고 있는 수능시험 개편안 역시 ‘공정한 교육’을 저해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인데, 개편 시안에 의하면 국·영·수의 비중을 더 높이고 제2외국어는 수능시험에서 아예 제외시키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국·영·수 중심의 수능시험이 실시된다면 학생들은 다른 과목들에 대한 공부를 소홀히 할 것이니, 국·영·수에 대한 사교육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경제적 뒷받침이 부족한 학생들이 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할 가능성이 더욱 낮아지므로, 불공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국·영·수뿐만 아니라 모든 과목에 걸쳐 자신들의 능력을 검증받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탐구 과목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은 탐구 과목에서의 성취도로써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대학에 진학하고 국가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며, 외국어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은 외국어로써도 그럴 수 있는 사회가 공정한 세상이다.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무역액이 미국 및 일본과의 무역을 합한 것보다도 많고, 2030년에 이르면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가 세계 경제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가 날로 확대되고 수출이 신장함에 따라 미·일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면서 수출시장이 빠른 속도로 다변화되고 있으며, 반도체와 자동차로부터 영화나 연속극 등의 문화상품에 이르기까지 품목 역시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외국어 교육이 강화되어야 하고, 더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교육이 수준 높게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영·수에 편중하고, 심지어는 제2외국어를 수능시험에서 제외하겠다니! 수능시험 개편 논의를 즉각 철회하고, 관심과 논의의 초점을 더욱 다양하고 수준 높고 국제화된 공교육의 제공 쪽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공정한 교육’을 기하고, 한국의 백년대계를 올바로 세우는 길이다.
수능 시험의 과목을 줄이면 학생들의 학습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는 달콤한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는 학습의 고통이 가중될 것이다. 좋아하고 재능 있는 과목이야 공부하기도 재미있고 효과 또한 높지만, 취미도 소질도 없는 과목의 공부가 괴로울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시험과목이 줄어들면 국·영·수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입하게 될 것인데, 누구나 다 무조건 국·영·수에만 매달려야 한다면, 공부가 괴로워질 학생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 불문가지(不問可知)인 것이다. 교육 환경의 획기적 개선은 회피하면서, 수능시험 과목수를 줄이느니 늘리느니 하는 것은, 아랫돌을 빼다 위쪽에 놓고 윗돌은 빼서 아래쪽에 괴는 것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조삼모사(朝三暮四)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의 세상에서는 양질의 교육을 자식에게 제공하는 것이 신분 대물림의 중요한 수단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근의 인사청문회에서도 드러났듯이, 공직자들조차도 자식의 학군을 바꾸기 위한 불법전입을 서슴지 않았고, 심지어 그런 불법은 눈감아줄 수 있다는 분위기조차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적 이익을 챙기기에만 급급했고, 국민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야 할 공적 의무를 져버린 배임이다. 실질적인 교육환경 개선을 달성하고, 다양하고 질 높은 공교육을 제공하며, 학생들의 성취도를 두루두루 인정해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공정 사회”와 ‘공정한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공복(公僕)’들이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