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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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는 불자가 되자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를, 보살에게는 열 가지 깊은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불자들이여, 보살(菩薩)은 열 가지 깊은 마음이 있으니, 모든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 깊은 마음과, 모든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의 도에 섞이지 않는 깊은 마음과, 모든 부처의 보리(菩提)를 통달하는 깊은 마음과, 온갖 지혜의 지혜를 따르는 깊은 마음과, 모든 마군(魔軍)과 외도(外道)가 동요하지 못하는 깊은 마음과, 모든 여래(如來)의 원만한 지혜를 깨끗이 닦는 깊은 마음과, 모든 들은 법을 잘 지니는 깊은 마음과, 모든 태어나는 곳에 집착하지 않는 깊은 마음과, 모든 미세한 지혜를 구족한 깊은 마음과, 모든 부처님 법을 닦는 깊은 마음이니, 만일 보살들이 이 가운데 편안히 머물면 온갖 지혜의 위없이 깨끗한 깊은 마음을 얻느니라.』
보살의 깊은 마음이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간에 물들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만 살려고 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으로만 살지 않고, 아집과 편견, 고집과 집착에 사로잡힌 삶을 살지 않는 마음입니다.
또 보리심은 부처의 보리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는 다릅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분이고, 부처는 불성이며 자성을 말하는 겁니다. 심성과 본심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통달해서 온갖 지혜에 따르는 깊은 마음, 마군이나 외도가 동요하지 못하는 마음, 신심이 견고하고 발심이 드러나면 태산준령(泰山峻嶺)도 어찌해볼 수 없는 그런 마음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달자 시인(詩人)은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인생이란 너무 눈부시게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내용이 들어 있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결단코 남과의 비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고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야. 그렇게 스스로를 만들며 살아가고 어딘가 빛을 만들며 사는 일,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세상에 어두움이 되지 말고 빛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들에게 꽃이 되고 향기로움이 되고 맑음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마치 부처님의 경전 한 구절을 읽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사어록 속에서 스님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가오는 가르침처럼 느꼈습니다.
또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대가 꽃과 나무에 물을 줄 때 그것은 지구 전체에 물을 주는 것이다. 꽃과 나무에 말을 거는 것은 그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서 주위와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원만한 지혜를 깨끗이 닦는 깊은 마음, 들은 법을 잘 지니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자기 좋을 대로만 사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6년 전, 인도 달람살라에서 링 린포체 스님의 비구계를 받는 수계산림 법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께서 그 법회에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고 가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달라이 라마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금강대계인 이 법이, 부처님 이래로 지금까지 2600년 동안 계승되어 온 이 법이, 스님들에 와서 자의적 해석을 하거나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간에 떠도는 말 중에 ‘요즘은 이씨와 해씨만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이익만 취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꼬집은 말입니다.  불섶에 자꾸 기름을 끼얹는 격이라는 겁니다. 활활 타고 있는 불에다가 기름을 끼얹으면서 “왜 타냐?”고 하면 안탑니까?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 삼독과 오욕이라는 기름을 몸에 끼얹고 불섶으로 뛰어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함께 깊이 생각을 해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불교가 인생과 다르지 아니함을, 부처님 법이 출세간을 나누어 있는 것이 아님을, 불교가 중생들을 도와서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지옥으로부터 육도윤회의 업연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가르침을 깊게 믿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능가경(楞伽經)》에서 또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불교가 인생과 다르지 아니하고 불법이 세간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중생을 도와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을 업연으로 윤회하고 있는 것이 사라질 것이다.』
육도윤회의 업연은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지, 따로 관항목차가 있어서 사그라드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이라는 것도 다른 게 아닙니다. 잘 사는 모습이 수행입니다. 잘 살면 그것이 곧 성불(成佛)하는 길입니다.
저는 어릴 적 꿈이 운전수였는데,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 때의 꿈이 참 소박했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차만 운전하는 사람이 운전수가 아닙니다. 나를 잘 이끄는 것도 주인공인 운전수 마음, 통도사의 주지소임도 통도사를 이끌어가는 통도사운전수입니다.
제가 구룡사에서 처음 원을 세웠을 때 자주 사용한 말이 신심과 원력과 정진과 회향입니다. 신심이란 생명력입니다. 신심이 있는 사람이 발심한 것 속에는 정직한 원력이 필요하고 진지한 삶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유하지 않은 자만이 회향할 수 있다는 것은 성취한 자만이 회향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불교가 인생과 다르지 아니한 것은, 세간을 떠나지 아니한 불자나 어른이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저절로 우리의 업연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이 따로 있고, 정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모든 일들은 현재에 일어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제보다는 오늘 잘 살아야 되고, 오늘 보다는 내일 잘 사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이고 정진입니다. 따라서 현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를 놓친다는 것은 우리의 삶, 우리의 인생, 우리의 생활을 놓치는 것임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샘터》라는 잡지에 보면 ‘동심은 어른들의 마음의 고향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안식처다』라고 했습니다. 동심, 즉 천진무구한 그 마음, 순수한 그 마음은 모든 이들의 안식처 입니다. 그것이 따뜻함이고 그것이 편안함이고 그것이 넉넉함 입니다.
간디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하루는 슬리퍼를 신고 기차를 타려고 하다가 기차 레일 홈 사이 틈새로 신발 한 짝을 빠뜨렸습니다. 간디 정도면 기차를 치우고 떨어진 신발을 찾아서 신을 수도 있는데, 떨어진 신발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신발 한 짝을 마저 떨어진 그 자리에다가 놓고 맨발로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러자 동행했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거기에다 놓고 가십니까?”
이에 간디가 대답하기를, “한 짝은 쓸모가 없어도 거기에 온전하게 두 짝을 놓아두면, 누군가는 한참 잘 신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비심이고 보살심입니다. 이것이 따뜻한 마음입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고통이 없습니다. 괴로움이 없습니다. 슬픔이 없습니다. 욕심 하나만 없어도, 어리석지만 않아도, 화가 안 납니다. 짜증을 안 냅니다.
그렇다고 욕심을 없애라고 해서 무사안일에 빠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100만 원의 월급을 받는 사람이 100만 원어치 일을 해놓고 “나 돈 필요 없어” 하면 될까요? 우리 사회의 현실로 봐서, 최소한 300만 원 정도는 월급으로 받는 일을 하고, 그 돈으로 근검절약하면서 어렵고 힘든 이들과 함께 나눌 수도 있는 삶을 산다면 행복 하겠지요. 과하게 욕심 부리는 것도 문제지만, 어리석어서 자기의 정당한 보수도 거부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 불자들이 자주하는 말 중에 ‘미래불교는 청년 불자가 짊어지겠다’고 합니다. 이 말을 어린이 법회에서 아이들이 했다면 맞습니다. 그러나 청년 불자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지금 청년불자가 짊어져야 합니다. 즉, 우리는 현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오늘을 잘 살면 미래인 내일도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있지만, 내일 잘 산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일 살아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진실로 모든 얽매임이나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 못할 것이 없고 어떤 공포나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괴로운 곳이라고 해도 그 괴로움이 생기는 탐진치 삼독심만 버리면 됩니다. 번뇌 중에 가장 큰 번뇌는 어리석음으로 생기는 번뇌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행동이 각기 달라서 서로가 서로의 단점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좋은 마음씨를 가지고 살고 싶거든 게으름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과 선행을 잘 배워서 마음의 괴롭힘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보리를 부지런히 배워서 함께 살아가는 모두가 다 소중한 사람들인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바로 내가 내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참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