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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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이야기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늦은 밤 깨어있는 시간을 저는 좋아합니다. 매일 아침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어서 심야의 적요를 즐길 수 있는 때란 욕심만큼 많지 않지만, 아니 늘 부족하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겠지요. 그러다 좀처럼 누릴 수 없는 귀한 연휴가 다가오면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오릅니다. 며칠 뒤면 추석이고, 저는 장장 닷새의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경험으로 판단컨대, 제가 누릴 느슨한 해방의 시간 역시 돌이켜보면 그 많은 시간을 뭘 하고 보냈는지 모르게 지나가겠지만 말입니다. 아마 긴 밤을 한껏 누리며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나른한 낮 동안 부족한 잠도 잘 것이고, 어쩌면 눈 여겨 봐뒀던 곳을 택해 짧은 여행을 다녀올지 모릅니다. 계획도 없고, 그래서 결국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보낼 게 뻔하지만 그 성근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지난 주말 회사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 연휴 동안 할 일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각자의 ‘취미’를 얘기하게 됐습니다. 그 자리에서 갓 입사한 젊은 친구가 해준 얘기입니다.
“제 친구 가운데 한 명은 입사지원서에 자신의 취미를 ‘차 후진하기’라고 적었대요. 특기는 ‘평행주차’였대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어요.”
그 말에 좌중은 자지러질 듯 웃었고, 저마다 그 묘한 친구에 대한 논평들이 쏟아졌습니다.
-괴짜네. 배짱도 있고, 창의적이잖아. 심사에서 의외로 좋은 평가를 받았겠는걸.
-그런 장난끼가 과연 통할까요? 이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인데요. 진지하지 못하다고 서류전형도 통과하기 힘들걸요?
-근래 입사지원서를 보면 얼마나 멋지고 다양한 경험과 재능들이 많은지 몰라요.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창의적이고 또 유익한 것들을 어떻게들 찾아내는지…. 물론 대부분은 검증 자체가 불가능한 것들이어서, ‘소설’을 쓴 것 같다는 의심이 들 정도예요. 
-오히려 그래서 더 어필할 수 있을 것 같은 걸. 승용차 후진은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 한 마디로 기본이지. 심사자의 눈에 띌 만큼 독창적이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대답. 악의 없는 장난끼는 있지만, 적어도 허풍쟁이는 아니라는 이미지는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대화 끝에 한 친구가 “그러고 보니 요즘 입사지원서에 자신의 취미로 독서나 여행, 영화감상, 음악감상 같은 걸 써내는 사람은 못 본 것 같군”이라고 말하자 젊은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거야 말로 제 무덤 파는 짓이죠. ‘취직할 열의도 성의도 없다’는 걸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이젠 독서나 감상은 더 이상 진지한 취미로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는 게 그 대화의 쓸쓸한 결론이었습니다.
저는 입사지원서에 ‘독서’를 취미로 적으면서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세대입니다. 달리 취미 삼을 만한 여가 문화가 부족하기도 했거니와 책보다 더 헐한 비용으로 여가를 보낼 만한 것도 드물었기 때문에 저 취미는 적어도 솔직한 거였고, 제 지원서를 읽었던 심사자도 한치의 의심이나 심드렁한 느낌이 없었을 듯합니다.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 취미는, 이제는 취미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독서입니다. 한 마디로 달라진 세상에서 새로운 세대에겐 내세울 만한 취미가 없는 사람이 돼버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삶이 우중충하게 낡았다거나 불만스럽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취미가 없어서 사는 게 재미없지는 않습니다.
 
자유로운 늦은 밤 시간에 제가 주로 하는 것도 독서입니다. 역사나 철학 관련 인문서를 읽을 때면 제가 조금씩 깊어지는 듯한 느낌(물론 잠깐 동안의 착각이기 쉽습니다만) 때문에 행복해집니다. 타인의 진중한 사유를 담은 에세이를 읽게 되면 그의 마음을 따라 제 사유의 폭도 그만큼 넓어지는 듯해서 기쁩니다. 시나 소설, 특히 제가 좋아하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을 읽을 때면 주인공의 까칠하지만 단단한 정의감과 웅숭깊은 인간애에 흠뻑 빠져, 마치 제가 악당을 제압하는 거친 주인공이라도 된 듯 우쭐해지고 흥분돼 잠을 설치기도 합니다. 그 감흥은 꿈으로 이어져 저 스스로 얼토당토않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독서의 이력들이 제 삶을, 더디게나마 조금씩 넓히고 깊게 해준다고 믿습니다. 그 넓이와 깊이가 제 기대나 욕심만큼 확보될 리는 없겠지만, 또 그것들이 제 삶을 물질적으로 윤택하고 안락하게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 과정에서 저는 보람을 찾고자 노력해왔습니다. 또 제가 읽은 책들에서 얻은 알량하나마 틀림없이 존재하는 지식과 지혜와 사유의 방법들이 제가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는 다양한 판단과 선택의 순간에 은밀히 도움을 줄 것을 기대하고 또 믿습니다. 제가 독서라는 취미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다른 다이내믹하고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취미거리들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모르는 탓일 수도 있지만, 더 나은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선택할 만큼 제 취미가 덜 흥미롭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제 취미를 사랑하고, 그래서 그 취미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소중합니다.
제가 지금 아주 진부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이 계절이 가을이고,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가을은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라고들 합니다. 왜냐하면 독서하기 좋은 계절은 따로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을은 무얼 하더라도 좋은 계절입니다. 사랑하기도 좋고 이별하기도 좋고, 낯선 시간과 공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좋고, 미뤄뒀던 일이나 공부에 몰입하기도 좋을 것입니다. 당연히 독서하기도 좋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말은, 어쩌면 책과의 사랑을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이라는 의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 사랑에 빠져들면, 연인에게 반하면 날 새는 줄 모르게 되는 것처럼,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그 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은 너무나 많고 다양하고 또 다이내믹해서 지치거나 싫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역설적으로 독서란 취미일 수 없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 취미일 수 없는 것처럼, 독서는 삶 자체 아니 일상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가끔 찾아가는 절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대웅전 앞마당입니다. 그 공간은 어느 절이든 가장 넓고 깊은 공간입니다. 대웅전 앞 돌계단에 부처님을 등지고 앉아 내려다보는 마당의 풍경과 퇴설전 쪽마루에 앉아 비껴 보는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해의 움직임을 따라, 또 대웅전 처마와 마당의 탑들과 오래된 배롱나무의 가지들을 따라 자리를 옮겨가는 그늘들은, 열린 공간 안에서 빛의 시간과 겹쳐 흐르며 다채롭고 신비로운 깊이의 풍경을 펼쳐 보이곤 합니다. 흐르는 풍경 자체가 깊은 그늘 속에 앉아 마당을 응시하고 계신 부처님의 말씀이 되고, 또 한 편의 시가 되는 시공간의 경험을 저는 사랑합니다. 그 마당을 묵직한 책 마냥 하염없이 읽고 또 읽게 되는 계절이 또 가을입니다. 그렇게 독서의 경계는 종이로 만들어진 책갈피 안에만 갇혀 있지 않고 이 세상 전체로 한없이 확장되기도 합니다. 그 순간의 독서는, 다시, 자랑스러운 취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한 젊은 친구의 취미라는 ‘후진하기’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후진은 주행의 반대말이지만 옳은 길로 주행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점에서의 후진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그 후진은 뒤로 간다는 의미에서의 퇴보나 퇴행과는 다릅니다. 어쩌면 모든 취미의 본질이 저 젊은 친구가 말한 후진하기라는 말 안에 담겨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취미란 모든 삶이 이행해야 할 생산활동과는 무관하지만, 좋은 삶이라면 반드시 껴안고 가야 할 시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진을 하려면 주행하던 차는 일단 멈춰야 합니다. 후진해야 할 때 멈추고 길을 살피는 것은 삶의 지혜일 것입니다. 후진할 때를 잘 알고, 잘 후진할 수 있는 삶은 그래서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조금씩 더 넓고 깊은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