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 구룡사 회주
“혼자일 때 나는 온전한 나다. 벗과 함께 있을 때 반쪽이 나다. 여럿이 있을 때 나는 없다.”
- 서양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
무학자無學者는 세속적으로 배운 게 없는 사람입니다. 불교에서 무학자는 배울게 없는 사람입니다. 무심無心하다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
세속적 무심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불교에서는 분별하지 않는 사람, 한결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의 마음을, 마음 없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어떤 마음을 진정한 마음이라고 할까요? 한결같은 마음, 시비하거나 분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무심한 마음입니다. 혼자 있다는 것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소소영영昭昭靈靈, 밝고 신령스러운 본성을 지니고 사는 사람입니다. 일일일야一日一夜에 만사만생萬死萬生이라 했습니다.
수많은 생각과 망념, 분별시비는 나를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신, 해, 행, 증信解行.의 수행법은 바른 믿음과 이해, 실천으로 지혜를 증득해가는 가르침입니다. 믿음만으로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이해, 실천으로 증득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 시작 됩니다. 음식도 첫술에 배부르지 않지만 한 스푼씩 먹다 보면 저절로 배가 불러옵니다. 약도 한 번 먹는다고 바로 병을 낫게 하지는 않지만, 처방대로 약을 먹다 보면 병을 낫게 하듯이 신, 해, 행, 증의 수행법을 하게 되면 저절로 선근善根과 보리심菩提心이 증장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중생이 부처님을 보거나 들으면서도 업業에 덮여서 좋아함을 내지 못하더라도 역시 선근을 심게 되어 헛되지 않을 것이며, 필경에는 열반에 들게 되나니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여래如來의 계신데서 보고 듣고 친근하면 그 선근善根으로 모든 나쁜 법을 여의고 선법을 구족하게 되리라.”
- 화엄경 여래 출현품 -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수행이란 무엇인가에 “수행이란 깨달음의 완성이다. 그것은 죽음의 가치를 진정한 삶의 가치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다.” 했습니다. 그 수행은 본성을 바꾸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면, 이익은 얻을 수 있겠지만 진정한 행복은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사 모든 것은 덧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인생만 무상無常한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맑고 깨끗한 지혜를 가지지 못해서 인생이 무상하고 덧없다는 걸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목이 있으면 다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알고자 하면 먼저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의 변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청정한 본성의 마음을 깨달아 지닐 수 있습니다.
보살菩薩은 각유정覺有情이라 했습니다. 깨달은 분, 깨닫고 있는 분, 깨달을 수 있는 이를 총칭해서 보살이라고 합니다. 그런 보살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 욕심 때문에 그 어떤 이도 괴롭히는 일은 없습니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다른 이를 괴롭히거나 남을 원망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법구경法句經』에도 ‘원망을 원망으로 갚으면 원망은 쉼이 없나니 원망하는 마음을 쉬어야 원망은 사라진다.’ 하는 것입니다.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번뇌의 불이 꺼져야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욕락慾樂의 경계는 저절로 사그러들 것입니다.
모든 법에 편안히 머물면, 언제나 헤아리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지나간 과거는 아쉽고 미진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미래의 내일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 하였습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며 현재라는 시간도 멈춰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오늘의 시간, 현재라는 이 시간도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어느 스님 가르침에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 말라, 겁내지 말라, 무서워 말라.’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살아가도 그 사람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두려움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를 구할 사람도 나이고 나를 가두는 사람도 나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얽매이게 하거나 구속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가 나를 구속하는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능히 피해갈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구속하고 내가 나에게 속박당하고 얽매이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라면 내가 나를 구속하거나 속박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유형적인 것은 그 원인이 그 물건을 파괴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발생하는 원인 속에는 소멸되어지는 원인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능엄경楞嚴經』에도 ‘맑고 깨끗한 마음이 어둡고 침침한 허공과 만나서 부딪히고 요동치고 흔들리다가 바람기운 생기고 마찰력에 불기운 생기고 녹은 것은 물 기운이 되고 굳은 것은 흙의 기운이 되었다.’ 하였습니다.
순간에 발생하며 머무르고 순간에 분해되는 것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 하고, 노병사생老病死生이라고도 하며 생주이멸生住異滅이고 성주괴공成住壞空입니다. 이루어지는 것은 허물어지고 머무르며 소멸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인데요, 그렇게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덧없음을 알지 못하고 힘든 그림자에 노출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순간은 생겨나면, 그 자체의 소멸 작용은 움직이고 있는 현상으로 잊어버리지 말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극락極樂은 언제 가야 할까요? 지금 가야 합니다. 온화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그곳이 극락정토일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야 가는 곳이 극락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살아서 정토淨土를 구하는 삶을 살면 그곳이 바로 정토입니다.
중생들은 윤회輪廻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업業을 제거하려고도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악업이든 선업이든 업은 제거하려 하지 말라. 아무리 선업이어도 그것이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하셨습니다.
윤회의 수레바퀴는 선업이든 악업이든 우리를 옥죄이듯, 회전력만 더 가중시킬 뿐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하려면 무의식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늘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면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분별하는 삶이 아니라 순간순간 사라지는 경계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깨어있는 의지는 올곧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올곧게 사는 생활이 되도록 탁마하며 사는 불자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