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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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星雲 스님


대만 불광산사 개산조


(지난호에 이어서)


(3) 사성제는 불교의 강목: 유교에 ‘사유팔덕四維八德, 삼강오상三綱五常’이 있듯, 불교의 강목綱目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전파되어 있는 대승의 8종 불교와 태국, 시킴sikkim, 미얀마 등의 부파불교, 그리고 밀교의 각 종파 등은 모두 사성제를 강목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3장 12부에서 불교경전의 요체가 풀이되어 나왔고, 수많은 근본교리의 강목에 모두 사성제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사성제를 이해하고 설명하고 수행하기만 하면 불법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불법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불법의 개론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는다. 현대의 불법 개론 어느 것 하나도 사성제와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불교 초학자들은 사성제를 연구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성제를 완벽하게 안다면 불법의 근본을 다 아는 것이므로, 계속해서 그 밖의 구구절절한 것들을 배우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법회에서 부처님은 사제법을 여러 차례 거듭 설하셨다. 사성제가 인생에 미치는 관계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지극히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한번은 부처님께서 목찬의 가시에 찔려 발가락에 상처를 입었다. 아쟈타삿투 왕(Ajatasatru, 阿社世王)이 크게 놀라자 부처님은 사성제의 진리를 설하시면서 대중의 슬픔과 상심을 위로했다고 한다.


(4) 사성제는 불교의 상징: 현대의 학교나 사회집단에는 모두 상징물이 있다. 국가에는 ‘국기’가 있고, 기독교에도 ‘십자가’란 상징이 있다. 그리고 불교의 상징은 바로 법륜法輪이며, 법륜은 사성제로부터 ‘삼전법륜三轉法輪’이 나온 것이다.
불교는 인도에서 생겨나 전파되어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지만, 지역의 풍속과 관습,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 처지에 맞는 불교 형식으로 발전되었다. 불교가 전래된 각 지역마다 불교의 근본교리에 대한 해석이 다르거나 불교에 대한 인식이 상이할 수는 있지만, 법륜과 사성제를 불교의 상징으로 삼는다는 데에는 전 세계 불교도라면 응당 이의가 없을 것이다.


현재 세계불교도우의회世界佛敎徒友誼會는 오색기를 모임의 상징 깃발로 삼았는데, 이는 오승공법五乘共法을 의미하며, 오승공법이라 할지라도 그 근본은 역시 사성제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오승五乘이란 해탈解脫에 이르게 하는 부처님의 다섯 가지 가르침을 뜻한다.
불교는 모두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본부가 없고 지나치게 자유스러우며 계파도 많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지식을 다 갖추지도 않은 불자들이 제각각 떠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해서 불교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불교가 만약 통합하려고 한다면 앞으로 이 사제의 ‘삼전법륜’을 가지고 세계의 불교를 통일해야 하며, 탁월한 식견을 가진 인사가 이 목표를 위해 힘써 주기를 바란다.


2. 사성제에 대한 부처님의 비유 설법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하신 법이다.
사성제는 남전·북전 불교와 한전·장전 불교 모두가 존중하는 가장 기본교의이자, 세간과 출세간의 해탈에 이르는 유일한 도리라고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만 후세에 불제자들이 사성법을 성문·연각법이라고 여기는 것은 사성제를 소승법으로 폄하시키는 것이다.
사실 대승 경전 가운데에도 사성제에 대해 논한 것이 많이 있다. 『승만경勝.經』, 『대반열반경』 등은 대승적 해석을 덧붙였을 뿐만 아니라 사성제의 심오한 의미를 더욱 잘 표현해 놓았다.
사성제는 ‘고·집·멸·도’라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네 가지 진리를 가리킨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권17 「사제품四諦品」 제25에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苦諦)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 근심하고 슬퍼하고 번뇌하는 괴로움, 원수와 미운 이를 만나는 괴로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한마디로 오음五陰에 탐욕과 집착이 번성하여 괴로운 것을 고제苦諦라
한다…. 괴로움이 발생하는 진리(習諦: 集諦)란 사랑하는 마음과 욕심내는 마음이 서로 호응하여 마음이 항상 염착染着되나니, 이를 일러 고습제苦習諦라 한다……. 괴로움을 소멸하는 진리(盡諦: 滅諦)라 함은 욕애欲愛가 남김없이 다하고, 다시 일어나거나 짓지 않는 것이니 이를 일러 고진제苦盡諦라 한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중요한 진리(苦出要諦: 道諦)란 정견正見, 정치(政治: 正思), 정삼매(正三昧: 正定)의 8가지 바른 길을 이름이니 이를 가리켜 고출요제
苦出要諦라 한다.
사제의 ‘제諦’는 바로 진리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깊이 살펴 거짓됨이 없이 진실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 네 가지 모두 진실되고 거짓이 없으므로 사제 또는 사진제四眞諦라고 한다. 또한 이 네 가지를 성스러운 견해라고 하여 사성제四聖諦라고도 한다.
사성제는 대체로 불교가 우주 현상을 해석할 때 사용하는 귀납법이다. 그중 ‘고’와 ‘집’은 미망 세계의 결과와 원인을 표시한다. 즉 세간의 번뇌라는 결과가 고제이고, 세간의 번뇌의 원인이 집제이며, 번뇌가 없는 출세간에 이른 결과가 멸제이고, 번뇌가 없는 출세간에 이르는 원인이 도제이다.
인과의 순서로 본다면 사성제는 집, 고, 도, 멸의 순서여야 한다. 그런데 왜 불교에서는 결과를 먼저 말하고 원인을 나중에 거론한 걸까? 그것은 중생의 근기 때문이다. ‘결과’는 이해하기 쉽지만 ‘원인’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중생을 인도하는 방편으로 부처님은 부득이하게 고통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어 번뇌를 끊어내게 한 것이다. 계속해서 열반의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어 그것을 흠모하게 한 다음, 다시 도를 닦는 방법을 설하시어 계속 수행하게끔 한 것이다.
사제의 의미는 종합적으로 『아함경』,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毗達磨雜集論』 등 모든 경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고제


괴로움(苦)이란 넓게는 몸과 마음이 고뇌에 꽉 차 있는 상태를 말한다. 고제苦諦는 생사윤회의 실상이 곧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인생의 실상이 본래 괴로움이라는 이치를 설명하고 있다.
경전에 의하면 괴로움에는 이고二苦, 삼고三苦, 사고四苦, 팔고八苦, 팔만 사천, 심지어 셀 수 없이 많은 괴로움이 있다고 한다. 이 괴로움을 현대인의 생활에 맞춰 현대인의 언어로 바꿔보면 아마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 타인과의 관계 부조화(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괴로움, 원수와 미운 이를 만나는 괴로움), 자신과 신체와의 부조화(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 자신과 마음과의 부조화(탐·진·치의 괴로움), 자신과 물질과의 부조화(거주 공간의 협소, 뜻대로 안됨,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자신과 일과의 부조화(실업, 불합격), 자신과 사회의 부조화(치안 불안, 경제 불황), 자신과 자연과의 부조화(불편한 기후에서 오는 괴로움), 자신과 경계와의 부조화(칭稱, 기譏, 훼毁, 예譽, 이利, 쇠衰, 고苦, 락樂) 등이다. 그러므로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인간의 괴로움은 다할 때가 없도다.
세간에 수많은 괴로움이 있다고 해도 불교에서 괴로움을 논하는 목적은 우리들에게 괴로움의 실상을 알게 하고 더 나아가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찾도록 함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괴로움을 떨쳐버리고 즐거움을 얻을 것이며 해탈에 이를 수가 있는가가 불교에서 괴로움을 논하는 최종 목적이다.


2) 집제


‘집集’은 모여서 쌓이고 불러들인다는 의미이다. 집제集諦는 바로 고통이 형성되는 원인이다. 『성유식론成唯識論』 권8에 보면 “생사生死가 서로 계속되는 것은 혹업고惑業苦에서 비롯된다” 하였다. 중생은 무명, 탐애, 진에瞋. 등의 번뇌에 혹사(惑)당하며, 온갖 악업(業)이 쌓이고, 갖가지 업보에 따라 갖가지 괴로움(苦)을 불러오게 된다. 이렇게 보면 혹(번뇌), 업(행위), 고(괴로운 과보)가 서로 인연이 되어 쉼없이 순환하며,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생사를 윤회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번뇌는 업력을 초래하고 미래의 생사과보를 일으키는 이른바 ‘발업윤생發業潤生’의 작용을 한다.
번뇌는 자성自性을 미혹시키는 마장魔障이며, 중생의 진여불성을 가리고 뒤덮을 수 있기에 ‘장障’ 또는 ‘개蓋’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마치 밧줄로 꽁꽁 휘감고 있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에 똬리를 틀고 뒤엉켜 있어 ‘결結’ 또는 ‘전纏’이라고도 한다. 중생의 몸과 마음을 속박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하므로 ‘계系’, ‘박縛’이라고도 한다. 또한 먼지처럼 중생의 심성을 오염시킬 수 있으므로 ‘구垢’라고도 한다.
홍수처럼 좋은 품성을 싹 쓸어버리기 때문에 ‘폭류瀑流’라고도 하다. 중생을 생사의 가운데에서 헤매도록 혹사시키므로 ‘사使’라고도 한다. 또한 중생을 견제하며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액.’이라 부른다. 중생의 번뇌는 서로 촘촘히 짜여 있는 것이 마치 빽빽이 우거진 숲과 같으므로 ‘조림稠林’이라 한다. 중생에게 번뇌가 생김은 눈 등 육근을 통해 새어나가 환난이 생기는 것이므로 ‘루漏’라고 부른다. 잠재된 번뇌는 중생의 의식 저 깊은 곳에 잠자고 있다가 지극히 작은 움직임에도 부지불식간에 중생의 신심을 흔들어 놓을 수 있으므로 ‘수면隨眠’이라 부른다. 번뇌는 먼지처럼 우리의 심성을 오염시킬 수 있으므로 ‘진로塵勞’라고 부른다. 번뇌는 본래 고유의 심성을 가진 물체가 아니라 진리에 미혹당해 생겨나는 것이므로 ‘객진客塵’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