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환 / 독자, 대구시 동구 신천동
사람이 살아가면서 때로 만나게 되는 경구(警句)는 아직 삶의 경험이 적은 사람들에게는 오랜 가뭄 끝에 만난 단비처럼 삶의 이정표를 제시하기도 하고, 또 삶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성찰적인 자세로 뒤돌아보게 하면서 하나의 반성거리를 던져주는 그러한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아직 나이가 어린 나는 말할 것도 없이 전자에 속할 것이다.
사실 평소 나는 도서관을 꽤나 뻔질나게 드나드는 편이다. 나는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편인 효목도서관(최근 수성도서관이 되었다)을 주로 들락거리는데, 지금까지 10년 넘게 도서관을 다닌 것 같다. 하지만 어림잡아 4∼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도서관의 매력을 그리 느끼지 못했다. 그저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어쩌면 기계적이고도 매우 단순한 목적에서 드나들었을 뿐이었다. 어떨 때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것이 귀찮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때까지도 나는 도서관이라는 ‘공간’ 자체의 매력을 깨닫지 못했던 셈이다.
그러나 점차 내가 한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한국사와 관련된 도서를 도서관의 책장 속에서 열심히 뒤지며 읽으면서 이때부터 나는 도서관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게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도서관은 나의 삶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도서관에서 본 ‘경구’였다.
어느 날, 책을 반납하고 대출하기 위해 효목도서관의 종합자료실에 올라가면서 나는 무심결에 위쪽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곳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액자가 하나 걸려있었다. 물론 이전부터 걸려있었겠지만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액자에는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이 한자로 적혀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하지만 그 뒤에도 도서관을 방문할 때마다 이 경구를 자주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 뜻이 풀렸다. 곧 ‘이익을 보고도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 뜻을 터득한 순간, 나는 이 말이 참으로 도서관과 같은 공간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때로 자본이나 물질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되어지는 ‘돈’과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온갖 ‘경쟁’이 판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이 말은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그야말로 경종을 울릴만한 매우 훌륭한 경구라는 생각이 도서관을 방문해서 볼 때 마다 들었다.
흔히들 오늘날의 시대를 무한경쟁시대라고 이야기한다. 무한경쟁시대라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인간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돈이라든지, 이에 버금가는 어떤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의 인간성(人間性)을 스스로 내던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며 또 우리 스스로가 그런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돈도 좋고 풍요로운 물질문명도 좋지만 인간성이 말살된 사회에서 인간이 제대로 된, 정말 참답고도 의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이익을 보고도 그 이익을 차지하려는 탐욕을 버리는 것도 인간으로선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견리사의라는 말을 경구라고 보는 것이다. 곧 이익을 보고도 그 이익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정 그 이익이 자기 자신에게 참된 이익인지 혹은 의로운 이익인지를 따져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이 말은 하나의 경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견리사의’라는 큰 울림이 될 만한 경구를 접한 뒤 도서관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대구의 앞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남부도서관을 방문했다.
남부도서관은 효목도서관과 달리 도서관 본관 현관을 계단을 통해 올라가도록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서관이 앞산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는 탓에 주변에 나무가 퍽 많아 나무를 한 번 둘러보기 위해 고개를 휙 휘저었다. 그 순간 내 옆쪽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커다란 돌이 눈에 들어왔다. 그 돌에는 검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읽고, 쓰고, 생각하자.”
이 말을 본 순간 나는 ‘견리사의’의 참 뜻을 알았을 때 느꼈던,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전율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누가 이 말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나의 관점에서 보기에 견리사의에 버금가는 경구임은 분명했다.
나는 남부도서관을 나오는 도중 또 한 번 이 말을 보고는 이 말이 우리가 도서관을 다녀야 하는 까닭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지만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유일한 근거는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란 능력은 단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적어도 ‘샘이 깊은 생각’은 결코 자신이 한 번 만에 창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단히 읽고 쓰고 그러면서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야 ‘샘이 깊이 생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의 학문을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 사교육열풍으로 온 나라가 시달리고 있다고 하는데, 어찌 보면 오늘날 우리들은 이 ‘읽고, 쓰고, 생각’해야 된다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덕목은 싹 빼버린 채 그저 수동적으로 달달 외우고 시험만 잘 보면 된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읽고, 쓰고, 생각하자’는 경구를 통해 이런 반성을 해봄직도 할 것이다. 물론 나 자신부터 견리사의의 자세로, 또 ‘읽고 쓰고 생각하는’ 자세로 삶을 살아가기를 다짐해 본다. 언제나 ‘나 자신부터…’라는 태도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니까 말이다.
 
<발문>
읽고, 쓰고, 생각하자’는 경구를 통해 이런 반성을 해봄직도 할 것이다. 물론 나 자신부터 견리사의의 자세로, 또 ‘읽고 쓰고 생각하는’ 자세로 삶을 살아가기를 다짐해 본다. 언제나 ‘나 자신부터…’라는 태도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