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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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세상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중세 예술이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웠던 르네상스 시대는 ‘아름다운 삶’에 대한 욕망이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시민들은 정중하고 고상한 삶의 형식을 중시하고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로는 형식이 실용을 앞질러, 경찰이 시내 순찰을 돌면서도 반드시 서너 명의 풍각쟁이들을 앞세우게 해 연주 소리에 범죄자들이 숨을 수 있었고, 교회에서 봉헌을 하면서 서로 먼저 하지 않겠다고 사양하는 바람에 미사 일정이 진행되지 못할 정도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형식적 절차는 명예의 문제였고, 절차의 위반은 곧 모욕이었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삶을 미학적으로 규제 가능한 질서 속에 두고자 했던 중세인들의 열정이 그 정도였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그의 저서 <중세의 가을>에서 인간이 삶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세 갈래 길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부정否定의 길’입니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현세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다고 믿어, 현세에서 헛되이 뭔가를 추구하기보다 내세의 약속된 복락을 위해 기도하는 삶입니다. 기독교적 신앙에 근거한 이러한 삶의 길은 중세의 개인뿐 아니라 시대적 정신이었고, 문화의 목표였습니다.
두 번째 길은 ‘현실의 길’입니다. 이 세상을 개선하여 보다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인데, 중세인들은 거의 이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이 만든 것이어서 원래 좋은 것이지만 인간의 죄악 때문에 세상이 비참하게 변한 만큼, 오직 자신의 직업에서 덕성을 발휘하는 것만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길이라고 해도 좋을 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길은 18세기 이후에나 인류의 이상 안에 자리 잡습니다.
세 번째 길은 저자가 “꿈의 땅을 통과하여 나아가는 길”이라고 표현한, 비유하자면 ‘예술의 길’입니다. 현실은 비루하지만 그 현실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데아(이상)의 황홀 속에서 현실의 가혹함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영웅주의적 예술이나 자연에의 향유 등이 그런 것인데, 이 길을 통해 중세인들은 예술의 형식을 삶의 형식으로, 삶의 형식을 예술의 형식으로 가꾸어 갔다고 합니다.
한편 부정의 길은 한없이 나아가다 보면 광신의 길과 만납니다. 현실의 삶을 규정하고 의미 지우는 존재의 모든 것들을 내팽개친 뒤에 남는 것은 형해화形骸化된 영혼뿐입니다. 그 길은 내세의 복락이 아니라 현세의 몰락으로 연결되는 파멸의 길입니다. 현실의 길 역시 과도하게 집착하다 보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삶을 황폐하게 만들 공산이 큽니다. 이상을 오직 물질적 풍요와 실용주의적 편의에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초월적 꿈과 이상이 없는 삶, 예술적 아름다움을 외면하는 삶은 그 자체로써 오늘 우리의 거칠고 삭막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길 역시 가파르게 그 길만 좇다 보면 현실감각을 잃기 쉽습니다. 꿈이 투과된 삶은 낭만적일 수 있지만 꿈에 빠져 허우적대는 삶은 비루합니다. 극단에 이르면 자폐적이고 도피적인 삶으로 타락할 수 있습니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이겠지만, 가장 이상적인 삶은 세 갈래 길의 의미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조화의 길을 개척해가는 것입니다. 초월적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현실의 난관들을 넘어가는 힘, 현실의 어려움에 맞서면서도 아름다움의 세계로부터 눈 돌리지 않는 의지, 아름다움이 초월적 가치로 나아가고, 또 초월적 가치로부터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향유할 수 있는 감각. 종교와 예술과 현실이라는 이 세 요소는 어쩌면 인간이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꿔가기 위해 갖춰야 할 본질적인 요소일지 모릅니다. 그것은 르네상스의 시공간을 넘어서는 가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상과 달리 어느 개인이든, 어느 사회나 시대든 이들 가운데 어느 한 요소에 치우치기 마련입니다. 중세의 시민들이 두 번째 길을 몰랐던 것처럼, 그리고 근대 이후의 인류가 두 번째 길에 치우쳐 살고 있듯 말입니다. 저자는 삶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태도에서 르네상스와 근대는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 지점에서 예술은 삶과 극명하게 분리됩니다.
“예술은 더 이상 인생의 즐거움을 이루는 고상한 것으로서 인생의 한 가운데 있지 않고, 인생 바깥에 초연히 위치하여 멀리서 감상하는 어떤 것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예술을 교육과 휴식의 순간에만 바라보며 높이 숭앙하는 어떤 것으로 취급한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과 세상을 구분하는 저 오래된 이원론이, 예술과 인생의 구분이라는 또 다른 형식으로 등장했다.”
우리가 한 개인의 생을 아름다운 삶이라고 평가할 때, 거기서 찾게 되는 미덕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도 아름답고, 어려움 속에서 값진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삶도 아름답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 바깥에서 아름다운 무엇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구현하려는 의지와 노력이고, 그러자면 아름다운 삶에 대한 모색과 고민이 전제돼야 합니다.
최근 한 시민단체가 전국 초중고교 학생 1만여 명을 대상으로 ‘2013 청소년 정직지수’를 조사했는데, 고학년생일수록 정직지수가 낮아졌다고 합니다. ‘10억원이 생긴다면 죄를 짓고 1년간 감옥에 가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초등학생의 16%, 중학생의 33%, 고교생의 47%가 ‘괜찮다’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설문 항목은 그 외에도 다양합니다.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 ‘참고서를 빌려주기 싫어서 친구에게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친구의 숙제를 베껴서 낸다’ ‘인터넷에서 영화 파일을 불법으로 다운로드한다’…. 보도된 바에 따르면 이 연구를 총괄한 한세대 미디어영상학부 안종배 교수는 “입시경쟁 체제에 매몰돼 친구를 경쟁자로 인식한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원인을 입시경쟁체제나 윤리교육 부재의 문제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한지 의문입니다. 또 설문 결과를 곧장 정직지수로 점수화하는 것이 옳은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아예 조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실천의지와는 별개로 설문 문항만 놓고 보자면, 어떤 대답이 정직해 보일 대답인지 모르는 청소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거꾸로, 실천의지는 전혀 없으면서 어른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대답을 하는 것이 덜 정직한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청소년들의 저 위악僞惡적인 응답은 그들이 교육받아온 학교 현실과 기성세대의 사회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라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청소년들의 추락한 정직성을 우려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 사회에 대한 냉소와 허무를 우려해야 할 것이고, 윤리교육의 부실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교과서와 딴판으로 굴러가고 있는 사회의 병든 현실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은 청소년의 인식이 아니라 이 사회 전체, 그들에게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보여주지 못한 어른들의 삶일 것입니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 시상식에 불참하면서 대신 보낸 수상연설문에서 선배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을 인용합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입니다.(Beauty will Save the World.)”
저는 두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 말한 ‘아름다움’을 하위징아가 말한 세 갈래 길의 조화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세상은 길 잃은 세상이고, 그 어떤 신神도 그런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나 신을 찾기 이전에, 그 종교에서 그 신에게서 무엇을 구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