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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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본래 알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음이요

 











                                  조계종 9대 종정 노천당 월하대종사



옛 고인(古人)들 말씀에 의하면 참선을 해서 견처(見處)가 생겼다 하여‘이것이다’라고 내어 놓는다면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하였고 진여당체(眞如當體)자리에는 이르지 못했음이라 하였다.

道本不屬知不知
不知無記知妄想
故謂佛祖出頭時
只有輿人說自度


도는 본래, 알고 모르는 것에 속하지 않음이요,
아는 것도 아니요, 기억할 것도 없어서
모든 것이 다 망상인 줄 알라.
짐짓 이르되 불조가 머리를 내어 오는 때에,
자못 사람과 더불어 자기의 도를
설하는 것에 불과함이로다.

도의 진리라는 것은 본래 알고 알지 못하는 것에 속하지 아니함이니, 그것은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것도 아닌 그 중간을 잘 취득(取得)해야 하는 것이다.
안다함은 망상이요, 모른다 함도 당체(當體)에서는 모두 분별심(分別心)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계성(溪聲)이 무비광장설(無非廣場說)이라는 말이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부처님의 무진설법 아님이 없다는 말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할 때는 계곡물 소리가 단지 물 흐르는 소리 같지만, 그 듣는 안목과 눈을 갖춘 사람이 볼 때는 무진법문(無盡法門)이 그 속에 깃들어 있으니 혜안이 밝은 사람이라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참선(參禪)이라는 것은 화두를 부지런히 갈고 닦아서 의심 덩어리를 깨쳐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는 것이다.
보통 선하는 납자들 중‘이번 철에나 소식이 있으려나. 다음 철에나 소식이 있으려나.’하고 치구심(馳求心)과 허구성을 가지고 정진에 임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참선하는 이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주력을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눈으로 보려고 하는염원(念願)에 젖어 어느 정도 하다 보면, 웬 사람이 뭐라고 하는 것도 보이고, 또한 짐승들이 안근(眼近)에서 뛰어 노는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기질이 튼튼하지 못해서 정신이 자꾸 무엇을 치구하다 보니까 자기의 염원이 자기 스스로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혹자는 이를 일러 말하기를‘도가 어느정도 이루어지니까 시험해 보느라고 그런 것이 나타나는것’이라는 둥 별별 여러 의견들이 많은데, 이것은 아무리 좋은 경계, 아무리 좋은 소리를 한다 해도 마음이 거기에 쏠려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런 경계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나타나는 것이 아니므로 보이면 보이는가보다 하고 그냥 마음을 억누르고 나아가면 스스로 사라지는데 그렇지 않고 거기에 요동이 되면 잘못하다가 사도(邪道)에 떨어지기 쉽다.

梅技片白知足春
從此不疑天下事
一去一來生窮意
去來本自然


매화가지 한조각 흰 꽃잎으로써
족히 봄인 줄 알 수 있음이요,
이로 좇아 천하의 일을 의심치 아니함이로다.
나팔 불고 노래하는 이 본자연이로다.

일체의 삼라 만법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좇아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은 들어서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지만은 실제로 내 자신이 그런 수용을 할 수 있고, 그런 경지에 이르렀나 하고 각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눈 감아 생각해 보면 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되‘불법(佛法)을 설(說)하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지혜스러운 사람도 알 수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비유컨데 마치 어둠 가운데에 값진 보배가 있어도 등불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과 같아서 누구나가 참스러운 보배 즉, 진리라는 자성(自性)자리를 가지고 있지만은 그것을 갈고 닦는 힘이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곳에서는 등불이 있어야 볼 수 있듯이 자기 스스로가 보고 알 수 있는 힘을 길러야만 한다. 삼라만상이 진법(眞法) 아님이 없다는 말도 그러한 힘이 생겨서 그 경계를 볼 수 있는 안목이 갖추어 졌을 때에 하는 말이지 보통 사람들 한테는 해당될 수 없는 얘기다.

그러한 힘을 기르기 위해서 우리가 일년에 두 번씩 결제와 해제를 하는 것이다.
어쨋든지, 이번 안거(安居)에는 확철대오(確撤大梧)는 못하더라도 근사(近似)하게 십분지 일이라도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결제를 맞이하는 의의가 있지 아니한가 싶다.
 
不入紅爐爭辯眞假
不童己災不幕諸聖


어찌 홍로에 들지 않고 진가를 가릴 수 있겠는가.
거듭 이미 이 영특해짐이 아니라
모든 성현은 생각치 않음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