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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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의 일상화·대중화 시급

정성수 세계일보 종교전문기자


흔히 불교를 어렵다고 한다. 그것은 스님들 이 법상에서 가르침을 주는 불교 용어들이 어렵기 때문이다. 한 불교 관계자는“스님들이 하는 법문을 제대로 알아듣는 불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느냐”며 회의를 나타내고, “열에 아홉은 뜻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불교 용어가 어렵다 보니 자신은 겨우 이해했다고 해도 남에게 잘 전달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귀한 깨침의 말씀들이 사장되기 십상이다. 기독교의 전도처럼 불교의 포교가 활기를 띠지 못하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불교 간화선의 대가인 어느 큰 스님의 법문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우리가 아는 선(禪)은 대부분 화두 들고 참구하는 것으로만 아는데, 그 예는 잘못된 것입니다. 선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인지요. 꼭 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선은 왜 닦습니까? 과연 선이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 신도님들이 제 말씀을 듣고 있는 것, 바로 그게 선입니다. 선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바로 제 말을 듣고 보는 바로 그것이 선입니다. … 내 자신이 선이기 때문에, 부처요 불성이란 말이 성립됩니다. 부처님께선 깨치고 보니 유정(有情)과 무정 (無情),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모든 존재가 연기로 존재하고 연기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사람은 여래를 본다 했습니다.

존재가 연기이자 법이며 여래이기에 우리는 그대로 선이고 부처입니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되기 위해 참선한다는 생각을 내면 틀린 소리일 뿐더러 시간만 낭비됩니다. 이 존재 자체가 선이요 부처란 사실을 오늘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다소 긴 인용구였지만, 필자가 아는 한 가장 논리적이며 대중이 좋아하는 스님의 법문이기에 말미까지 인용해 봤다. 위 법문에서 스님은 선을 설명하면서“제 말을 듣고 보는 바로 그 것이 선”이라며 명쾌하게 정의를 내려준다. 아주 쉽다는 의미가 다분히 담겨 있다. 그렇다면 많은 대중들이 그것으로 깨침을 얻고 선을 알
게 됐을까. 확신하기란 쉽지 않다. 스님은 자신의 법문으로 대중들이 선에 대해 확실히 이해했을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선은 여전히 모를 뿐이며, 선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유정과 무정, 법, 연기, 여래라는 용어는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망상만 증폭시켜 놓을 뿐이다.

불교 용어의 현대화와 대중화가 목마른 시점에서 최근 승려출신 출판사(민족사) 대표 윤창화씨가 펴낸 감성 불교사전‘내 마음을 치다’(동숭동)를 대하는 순간,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한자식 표현의 불교 용어들이 알기 쉬운 우리말로 풀어써 있을 뿐더러, 위트와 풍자, 해학까지 곁들여져 여간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책에서‘선’은 스님들의‘재산목록 1호’라고 표현돼 있다. 선승들이 깨닫는 그날이 올 때까지 항상 가슴에 걸어두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선은 또한 고요히 생각함이며, 명상이요, 마음의 정화다. ‘법’은 부처님의 일평생 가르침이요, 진리(존재하는 것,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스러져 간다)다.‘ 연기’는 불교 용어를 승가공동체만 알아듣고 끝나게 한다면 이는 불자를 바보 멍청이로 만드는 일이요, 부처님께 죄를 짓는 일이다.

언제까지 대중이 못 알아듣는 법문을 계속할 것이며, 언제까지 불자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을 것인가.
아버지가 있으므로 아들이 있고, 추녀가 있으므로 미녀가 있듯이 모든 존재와 사물은 상관관계 아래서만 생성·소멸·존재하는 이론이다. ‘여래’는 부처님에 대한 객관적·철학적 호칭으로, ‘그대가 부처’요, ‘그대가 여’라
고 풀이된다.

불교식 용어인‘화두’의 경우 승가에서만 쓰이다가 1980년대부터 일반에 널리 쓰이게 됐는데, 이는 화두라는 용어가 일반에 두루 이해됐기 때문이다. 윤 대표는 책에서 이러한 화두를‘아가씨들의 다리걱정’‘아줌마들의 뱃살 걱정’‘남자들의 정력 걱정’‘핵폭탄’등으로 다양하게 풀어낸다. 이쯤 되면 화두가 중요한 관심거리요, 고민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리라. 윤 대표는 더 나아가 ‘깨달음’을‘병아리 세상 구경’‘칠순 노인의 인터넷 채팅’으로 풀어놓는다. 가히 압권이다. 불교에만 있는 특별한 테마인 깨달음은 분명‘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이다. 즉, 불가능할 것 같지만, 가 닿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닐는지.

‘분별심’‘불성’‘알음알이’등 용어 자체를 확연히 모르는데, 법상에서“분별심을 내려놓으라”“불성이 있다(없다)”“알음알이를 갖지 말라”고 법문한다면 그 누가 제대로 깨쳐 법문을 피와 살로 삼을 수 있겠는가. 모름
지기 불교 용어는“무게 있고, 장중해야 한다”



고 고집하는 분들에게 윤 대표의
‘감성 불교사전’ 은 불교를 폄하하
고 실추시키는 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언어를 모르는 데 어떻게 깨침이 오고, 언어장벽이 높게 쳐진
상태에서 어떻게 일반인들의 불교
를 기웃거릴 수 있겠는가. 애매모호한 법문이나 설명은 불자나 일반인들을‘불교’라는 보금자리에서 더 내쫓는 행위요, ‘사기’에 다름 아니다. 물론 승가만의 독특한 언어가 있고, ' 선은 논리를 초월한다'는 말도 있지만, 어디까 지나 일방적 상식논리에서 배제할 뿐, 선 자체로서의 논리는 정연하게 서 있어야 한다. 불교
용어는 누구나 알기 쉽게 간결하게 설명돼야 한다.

용어나 언어의 이해 없는 수행은 무의미하다. 불교 용어를 승가공동체만 알아듣고 끝나게 한다면 이는 불자를 바보 멍청이로 만드는 일이요, 부처님께 죄를 짓는 일이다. 언제까지 대중이 못 알아듣는 법문을 계속할 것이며, 언제까지 불자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을 것인가.

명상, 참선 등이 대중화되면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증폭되고 있다. 불교 용어의 일상화·대중화가 참으로 시급한 시점이다. 때마침 윤 대표가 5년여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기본적인 불교 용어들을 일반인도 이해할 정도로 쉽게 묶어 놓은 데 이어 내년쯤에는 좀 더 어려운 용어까지 깊이 있게 풀어쓸 계획이라고 하니, 이러한 소중한 사업이 부처님뜻 맞게 결실을 맺도록 불교계 전체에서 관심을 갖고 보듬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108개의 기본적인 불교 용어를 에세이처럼 쉽고 재미있고 진지하게 풀어써 읽기만 해도 절로 깨달음이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