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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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함을 아는 12월이 되기를

자족함을 아는 12월이 되기를


한해가 가면 또 한해가 온다. 연말이 되면 결코 멈춰주지 않은 채 홀로 내달리는 세월의 무심함에 혀를 내두르면서 ‘나는 과연 지난 1년 동안 무엇을 했는가’라는 회환과 자탄에 빠지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온 세상이 바뀔 듯 떠들어대던 밀레니엄 2000년을 맞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났고, 곧 2010년을 앞두고 있음을 실감할 때 그런 충격은 배가된다. 그런 자탄과 후회를 핑계로 한 술잔 속에서 자신을 학대하며 한해를 보낼 것인가. 자신에 대한 학대는 늘 말썽을 일으키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뿐 아니라 완벽을 추구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 자기 스스로에게 너무나 완벽한 것을 원하고, 성공적인 모습을 기대하면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나를 무단히 학대하며 스스로 때린 채찍에 괴로워하며 불행해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얼마든지 많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해 자신을 학대하려는 욕구가 차오를 때면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10년 전쯤 스리랑카에서 만난 사르보다야운동의 창시자인 불교운동가 아리야라트네 박사다. ‘아리’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는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의 불교대학인 나란다대학 교수로 있던 1958년 사르보다야운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사르보다야는 아리박사의 정신적인 스승인 인도의 ‘비폭력운동가’ 마하트마 간디와 간디의 제자 비노바바베가 자주 쓰던 용어로 ‘ 모든 이의 각성(깨달음)’이라는 말이다.

16세기 초부터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침략을 받아 1815년 주권을 잃은 스리랑카는 19세기 중반 영국이 스리랑카의 커피농장을 육성하기 위해 대거 이주시킨 남인도의 타밀족이 분리독립을 요구하면서 민족 분쟁이 끊이지 않은 지역이었다. 다수파인 싱할리족은 불교도였지만 타밀족은 대부분이 무슬림이었고, 여기에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아 민족과 종교, 문화가 다른 세력의 내분으로 6만여 명이 죽고 1백여만 명의 난민이 섞여있는 나라였다. 아리박사는 스리랑카의 분쟁을 종식시킬 길은 각자의 깨달음밖에 없다고 믿고 ‘모든 이의 깨달음’을 위해 ‘사르보다야 운동’에 매진해왔고, 그 결과 스리랑카 전체 마을 가운데 절반이 넘는 1만3천여 개 마을이 참여할 만큼 사르보다야는 스리랑카의 ‘희망’이 되었다.

콜롬보비행장에서 1시간30분쯤 달리자 사르보다야운동의 본산인 모라투와였다. 사르보다야 본부는 불교의 실천덕목인 팔정도를 상징하는 팔각형 건물이었다. 그 건물을 중심으로 농아학교를 비롯한 여러 복지시설과 명상센터 등이 사르보다야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아리 박사는 그 본부 한 켠의 사택에서 부인과 사르보다야 일을 돕고 있는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아리박사를 찾았을 때 마침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엔 봉사하는 엔지오 실무여성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봉사라는 그토록 아름다운 일을 하면서도 가끔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그런 모습이 더욱 실망스러워 괴롭기도 한데,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리 박사는 자신의 경우를 실례로 들어 답해주었다.
“전 밖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와 욕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거울을 봅니다. 거울 안에는 물론 ‘아리’가 있지요. 그러면 거울을 보면서 혼잣말을 합니다. ‘넌 정말 좋은 녀석이야. 오늘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았고, 늘 웃었고, 봉사했지. 넌 굉장한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데, 그러면 아무리 고된 일을 하고 와서도 피로가 싹 풀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아리의 답변을 들으면서 질문한 여성의 얼굴이 밝아져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이런 세계적인 불교 영성가도 이처럼 자신을 늘 용서하고 위로하고 보살피는데, 왜 난 자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을까, 이렇게 사랑스런 나를!’이라고 되뇌이는 듯이 보였다.

아리 박사는 이렇게 해서 자신으로부터 충만해진 자비의 물결을 가족과 친척과 동료와 이웃에게 보내고, 이를 민족뿐만 아니라 적대감을 품은 적에게까지 확대함으로써 자신과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무아’(無我)라는 불교적 진리 때문에 자칫 자신을 학대하거나 죄악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이 용해돼 대해처럼 넓어지는 대승보살이 되기는커녕 자칫 더욱더 자신을 옭죄어 더욱 더 좁은 ‘나’의 감옥에 갇힐 수 있다. <의식혁명>의 저자인 데이비드 홉킨스 박사는 “에고(개체적 자아)가 모든 사람의 목을 꽉 조이고 있다”면서 “그러나 에고는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에고조차도 사랑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나를 중시하는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수치와 죄의식을 느끼기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에고를 자비스럽고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나본 홉킨스 박사는 아주 현명한 방편을 내놓았다. 에고를 인정하되, 에고를 좀 더 객관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놀라운 것은 내가 가는 곳은 어디나 육신이 있다는 것이다. 육신은 귀여운 강아지와 같다. 육신을 돌보라. 육신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준다. 그 육신이 무엇에 집착하든 간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계율을 중시하는 종교인들은 쉽게 수긍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는 강연 도중 쉬는 시간엔 자주 담배를 피었고, 자판기에 가서 콜라를 뽑아 마셨다. ‘홉킨스 강아지는 담배와 콜라를 좋아하기 때문에 가끔은 그런 기호품들을 주곤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기호품들을 좋아하는 자신의 육신과 일체화가 되기보다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강아지처럼 자신의 육신을 객관화해 바라보면서 그 애완견이 좋아하는 먹잇감을 주는 듯 한 그의 태도가 조금도 추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한 신뢰감이 싹터 올랐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이 아니더라도, 나와 당신은 틀림없는 부처라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대각 후 일성이자 모든 불보살들의 한결 같은 깨달음이다.
자족함을 아는 세계라는 지족천(知足天) 즉, 도솔천에서 석가모니가 현세에 출세했듯이 우리도 회환과 비탄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자비와 자족과 기쁨의 마음 세계로 환원해, 각자가 각자를 너무도 사랑스런 강아지로 대해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용서해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준다면 나는 어떻게 달라지고, 내년은 어떻게 달라지며, 다음 10년은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



<발문>
자족함을 아는 세계라는 지족천(知足天) 즉, 도솔천에서 석가모니가 현세에 출세했듯이 우리도 회환과 비탄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자비와 자족과 기쁨의 마음 세계로 환원해, 각자가 각자를 너무도 사랑스런 강아지로 대해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용서해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준다면 나는 어떻게 달라지고, 내년은 어떻게 달라지며, 다음 10년은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