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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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밑의 송곳

사람들은 흔히 무슨 힘으로 사느냐고 물으면 ‘똥심’으로 산다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또 세상에서 가장 던지러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똥’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다. 긍정적인 말을 할 때도 똥이고 부정적인 대답을 할 때도 똥이다. 똥의 그러한 이율배반성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얼마 전 구미 태조산에 있는 도리사에 갔다가 해우소(변소) 입구에서 재미있는 시를 보았다. 제목이 ‘똥’이었다.


똥을 누다가 무심코
밑을 내려다봅니다.


내 깨끗이 씻은 몸에서
저것이 나왔으리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은
그 덩이덩이 똥 무더기들이
한가득 채워져


내 욕심의 잔여물이
그득그득 채워져
나를 노려봅니다.


그토록 잘난 체 했던
위선으로 도배된 얼굴에서
눈에선 눈곱이
코에는 콧물이
귀에는 귀지가
입에서는 침이
그리고 뱃속을 꽉 메우고 있는
세상을 함께 호흡하는 속물들
나는 그것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다시금 그런 나를 생각하면서
똥은 내 존재를 다시금
생각게 합니다.


이 시를 쓴 작자가 어떤 생각으로 이 시를 썼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상념에 젖었다.
우선 이 시는 어찌 보면 똥을 지극히 혐오하는 글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곰곰이 그 의미를 되새겨보면 똥의 부정적인 면을 통해 삶의 긍정적인 이치를 설파하고 있다. 지극히 생물학적인 배설행위에 불과한 똥을 통해 삶의 철학적 의미를 통찰하고 있다.
이처럼 똥은 있는 자리에 따라 긍정적인 힘을 발휘할 때도 있고 부정적인 배설행위로 비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 똥은 어떤 똥인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똥인지 가만히 한 번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런 내 똥과 삶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볼 필요가 있다.

요즘 세상엔 정말 똥 같지도 못한 똥들이 판을 치고 있다. 4대강 사업이 그렇고, 세종시 문제가 그렇고, 부산국제시장 사격장 화재사건 등이 그렇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배설행위를 잘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애초부터 배설행위만 잘 했어도 그 똥 같지도 않은 똥들은 오히려 ‘똥심’이 되어 우리나라를, 우리 국민들을 통합과 화합의 축제로 이끌고 갈 수 있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똥은 제 있을 자리에 있을 때 진짜 똥이 된다. 내 뱃속에 있을 때는 삶의 원동력으로, 배추밭에 있을 때는 배추를 키우는 힘으로, 변소에 있을 때는 변소를 변소답게 하는 냄새로 힘을 발휘한다.
『벽암록』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왕태부가 초경사에 갔더니 차를 달이고 있었다. 이때 낭상좌가 명초화상에게 차 냄비의 손잡이를 잡고 차를 따르려 하다가 냄비를 뒤집어버렸다. 이를 보고 태부가 낭상좌에게 물었다.
“차 끓이는 화로 밑에 무엇이 있소?”
“화로를 받드는 봉로신이 있지요.”
“봉로신이 왜 차 냄비를 엎어 버렸소?”
“천 날 동안 벼슬살이를 잘 해도 한 번 실수로 쫓겨나는 것 같지요.”
“이 말에 태부는 소매를 떨치고 나가버렸다. 이를 본 명초화상이 말했다.
“자네는 초경사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도리어 강 건너편에 가서 시끄럽게 하는가?”
“그럼 스님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사람도 아닌 것한테 당했구나.”


이 이야기의 마지막 말을 “똥도 아닌 것한테 당했구나.”로 바꾸면 더 시원한 선문답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들은 대체로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너그럽지만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차 없다. 자기가 잘못하면 어떻게 해서든 변명하려 들지만 남이 잘못하면 턱 밑에 송곳을 들이대고 나무란다. 그러다 세상 일 그르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태부는 천자를 돕는 삼공 가운데 한 명으로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앞에서 화로에 차 냄비를 쏟았으니 이만저만한 실례를 범한 게 아니다.
하지만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그 정도 실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평생 밥을 짓고 사는 아낙네들도 부엌에서 그릇을 깨먹는 일이 자주 있지 않은가.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벼슬아치 앞에서 ‘평생 일을 잘해도 실수 한 번 하면 쫓겨나는 것 같다’고 하다니 정말 똥 같지도 못한 똥 같은 말이다.
상대에 대한 실수나 잘못된 언사는 그 즉시 사과하는 것이 도리다. 괜히 변명하려고 하거나 그것을 뒤집으려하다가 더 튼 실수를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무라는 것도 큰 그릇다운 품격은 아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또 잘못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진짜 똥 같은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진짜 똥만도 못한 똥 같은 인간이 될 수도 있다. 똥을 피하고 두려워하기 전에 그 똥이 어떻게 해서 내 몸 밖으로 나왔는지, 그리하여 그 똥이 진짜 똥다운 똥이 되었는지 두루 한 번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