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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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미술사

감숙성 돈황 명사산(鳴沙山) 동쪽기슭에는 1.6km에 이르는 천불동(千佛洞) 또는 막고굴(莫高窟)이라 이름하는 무수한 석굴이 있다. 중국대륙에 현존하는 50여 개의 석굴 중 채색 벽화·소조불로서 불국토을 표현한 천불동은 366년에 락준(樂樽)이라는 스님이 명사산 꼭대기에 천불이 화현하는 것을 보고 석굴을 개착했다고 한다.

본격적인 석굴개착은 4세기 후반에 시작하여 7세기까지 천개 이상의 석굴이 개착되었으며, 현재는 492개의 석굴이 남아있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유적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엽 사이의 석굴이다.
돈황의 석굴은 14세기까지 북위(北魏), 수(隋), 당(唐), 오대(五代), 서하(西夏), 원(元)대에 이르는 천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조성되었지만 그 중 당(唐)대에 조성된 것이 가장 많다.
돈황의 석굴은 2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그 첫 번째 유형은 268동과 285동으로 대표되는 복합굴 형식으로, 예배를 위한 주실(主室)과 수도자들이 거처하는 승방(僧房)이 함께 있는, 마치 인도의 비하라(vihara, 毘河羅)같은 형식을 띠고 있다. 두 번째 유형은 254, 257, 251, 248동으로 대표되는 예매굴 유형으로, 이것은 중심에 탑주(塔柱)가 있는 석굴과 돔형 천정이 특징인 석굴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모두는 승방이 없고 예배굴만 있는 형식이다.

돈황의 석굴들은 인도의 마제형(馬蹄型)인 탑원 형태보다 승원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초기에는 인도식으로 모방을 했겠지만 후일 중국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고 보겠다. 굴 내 좌우 벽면에 불감을 만들고 여기에 불보살상을 배치한 구조를 하고 있다.
명사산의 석질은 왕모래가 섞여있는 역암(礫岩)으로, 개착하기는 쉬우나 벽면에 바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이런 까닭으로 석굴을 개착한 후 벽면에 흙이나 석회를 발라 벽화를 그렸는데, 당시 성행하였던 석가, 미타, 약사 등의 정토변상(淨土變相)과 법화, 유마, 화엄경 등의 변상 및 본생담, 불전도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를 연이어 보면 높이 5m, 길이 25km가 되는 엄청난 스케일의 벽화이다. 초기 그림들은 북위 태무제 폐불 이후 문성제에 의한 흥불기인 5세기 후반부터 시작된다. 그 후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를 지나 송대 이후 불교가 쇠퇴해가면서도 이곳에서의 불화와 불상의 제작은 맥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14세기까지 계속된다.

석굴 개착에 용이한 역암은 입체로 조각하기에는 부적당하여 조각(彫刻)이 아닌 소조(塑彫)의 기법으로 불상을 만들게 되었다. 이 소조기법은 아프가니스탄 동부지방의 쿠샨왕조 후예들에 의한 신간다라양식의 소조기법을 계승한 것으로, 나무골재에 짚, 갈대 등을 새끼로 묶고, 강바닥에 침전된 고운 점토(粘土)와 삼베, 모래 등을 섞어 형태를 만들고 여기에 백토로 마감한 후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하고 금박 등으로 장식을 하였다.
이것을 채색소조라 하며 현재 2천4백여 기가 남아 있지만 역사의 격동기에 훼손당하고 각국에서 도굴해간 것을 상상으로 복원해 본다면 그 규모와 숫자는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돈황의 막고굴은 채색소조 벽화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세계 최대 규모의 자연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돈황의 소조불상 양식의 전개는 막고굴 개착의 역사와 비례한다. 돈황의 초기 불상으로 연대가 올라가는 것은 북량(北凉) 때 것으로 중국과 인도의 양식이 둘 다 보이지만, 인도 양식이 돋보인다.
북위가 북량을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시킨 439년을 기점으로 돈황은 서역 경영의 전진기기로 군사, 정치, 상업의 중요한 중심지가 된다. 얼마 후 태무제의 폐불(446년)과 문성제의 흥불조치(452년) 이후 서역과의 교류가 빈번해짐에 따라 이곳 불상양식에도 인도미술의 영향이 나타난다. 제259동의 불상을 위시하여, 253, 254, 251, 263동의 불상군에서 건강하며 균형잡힌 불신(佛身)을 통하여 당당하고 수려한 용모를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제259동 북벽 불상의 사실적인 인체표현은 간다라 전성기의 불상을 보는 듯 하며, 분명한 이목구비와 얇은 법의 속의 불신에서 표현되어지는 간다라 미술의 정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원색의 강렬한 색채를 통하여 더욱 신비화하고 이지적이며, 강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육계는 크고 머리카락도 굴곡이 심하지 않은 파상형으로 정리하였으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온화한 미소를 디고 있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듯이 부드럽게 표현한 두 손은 선정인을 취하였으나 보통 선정인의 수인과 달리 오른손은 왼손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법의는 얇으며, 법의 주름선을 음각으로 처리하여, 전신을 감싸고 있는데 굽타시대 신마투라양식과 유사하다. 한쪽 무릎이 파손되어 있지만 좌우 대칭임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같은 굴(제259동) 서벽면의 2불병좌상을 보면, 역시 당당하고 유연한 모습을 만나게 된다. 높은 육계, 자유스러운 유희좌 편단우견의 법의, 원만한 상호, 유려한 의습문(衣褶文) 표현, 법의속의 건장한 불신 등에서 이 시대 미술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법화경 견보탑품(見寶搭品)의 다보(多寶)불, 석가불을 표현한 것이다.
남북조시대 화북을 중심으로 한북조의 특징적인 불상의 자세인 교각상(交脚像), 사유상(思惟像), 이불병좌상은 특기할 만하며 법의의 양식 또한 중국적인 도포(道袍)양식의 출현으로 불교가 중국에 완전히 토착화되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돈황의 영광은 수(隨)나라 양제, 문제의 흥불기를 지나 당나라에 들어와 중국 불교문화의 황금기를 이루면서 더욱 화려한 꽃으로 개화하였다 하겠다.
돈황의 벽화는 서역에서 전해온 불교문화가 중국 서북 지역의 토착 문호하와 융합이 되면서 나타난 예술적 형식이고 또한 한족 문화의 유입으로 인해서 세련되고 안정 된 표현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서역의 회화 기법과 중국의 회화 기법이 융합된 독특한 미술의 한 장르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