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이면 해마다 반복되는 화재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아침방송 헤드라인 뉴스(headline news)로 화재사고가 올라간다. 겨울철이면 대대적인 예방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얘기일 뿐 사고발생 앞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화재사고는 겨울철 단골 기사이기 때문에 각 언론사에서도 연중기사(annual report)로 분류하고 있다. 연중기사는 기본적으로 매뉴얼을 가지고 있는데 화재사고가 전형(典型)이 아닌가 싶다. 먼저 현장을 선취(先取)해야 한다. 특히 방송의 경우는 현장 없이 리포트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TV방송에서 화재 리포트를 하면서 현장그림이 없다면 전달력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미리 화재발생지점을 예상하고 24시간 순회 취재할 수는 없지 않는가. 발빠른 대응만이 최선의 대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화재 리포트는 일반적인 사회기사 보다 현장감이 강하다. 강-절도와 같은 형사사건은 기본적으로 경찰수사망이 먼저 진행된다. 취재망이 먼저 갈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고, 경찰수사에 맞춰 기사도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화재상황은 그렇지 않다. 수사 이전에 화재 현장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현장 그 자체가 취재현장이 되고, 수사현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취재가 수사 보다 선행된다고 할 수 있다. 화재사건 또는 사고의 인과관계는 진화(鎭火) 이후 잔해물을 토대로 밝혀질 수 있다. 물론 화재 현장에서 방화용의자를 검거한다든가 인과관계를 밝힐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포착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일본총리가 한국 대통령에게 전달한 부산사고
본격적인 겨울철에 접어들기도 전에 부산 사격장 폭발사고를 비롯해 크고 작은 화재사고가 전국적으로 잇따르고 있다. 부산 사격장 폭발사고는 내국인 사상자(死傷者)뿐 아니라 일본인도 포함돼 있어 국제적인 화재사고가 되었다. 현재까지는 별도의 방화 용의자가 있는 사건(事件)이 아니라 사고(事故)로 파악되고 있다. 일본인 7명이 숨지고 한국인 4명 등 모두 11명이 숨졌다. 최근 들어 단일 화재사고에서 일본인 최다 사망사고로 기록되고 있다. 사고 자체가 국제성을 띠면서 정부 차원의 대응속도와 수준이 달라졌다. 특히 일본인 사망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한국인 유가족들이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다. 정운찬 총리는 희생자 시신이 안치된 양산 부산대 병원으로 조문을 가 유족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보도에 따르면 사고 당시 한국 대통령은 일본 총리로부터 사고 소식을 들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사고 당일인 11월 14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회의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 중이었다. 그 날 일본의 하토야마 총리와 면담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일본 총리가 일본인 관광객의 피해를 언급하면서 사고수습 등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이 때문에 이 대통령은 청와대 관계자들에게 격노하면서 사태 수습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청와대도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한 고위 관계자는 이 대통령도 사고 소식은 들었지만 일본인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밝혔다. 서울에서 별도 연락이 와서 일본인 피해소식을 보고하려는 시점에 이 대통령은 하토야마 총리와의 회담장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과 정황으로 청와대의 위기대응시스템에 문제가 있지 않나하는 듣기 거북한 소리를 언론으로부터 들을 수밖에 없었다.
죽음에 대한 한-일간의 의식 차이
부산 사격장 폭발사고를 보면서 한일(韓日)간의 의식 차이를 또 볼 수 있었다. 유가족의 표정과 모습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언론에서도 후진국형 참사, 고질적인 안전불감증 등의 제목으로 질타했다. 일부 유가족은 일본인 사망자에게 집중되는 모습에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며 거칠게 항의했다. 외교적인 차원에서 이해는 되지만 개인적인 일로 치부하는 정부의 태도에 분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유가족 입장에서는 당연한 모습이 아닌가. 그러나 일본인은 조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참사 발생 나흘째 화재현장을 본 피해자 가족들은 흐르는 눈물을 삼키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혈육의 유품을 확인하는 그들의 손길은 떨렸지만 목 놓아 울지 않았고, 소리치며 한국 당국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 유족은 그동안 도와주신 일본과 한국 정부, 부산시에 감사한다면서 다소곳이 머리를 숙였다. 일본인 유가족을 안내한 경찰조차도 처음에는 유족들이 단호한 표정으로 불만을 표시했지만 냉정할 정도로 침착한 모습을 보였고 몰래 한쪽 구석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광복 이후 최대 사고…삼풍백화점 붕괴
95년 서울시 출입기자 시절의 일이다. YS문민정부 시절인데, 육지와 바다, 공중에서 큰 사건사고가 잇따랐다. 사건 제목만 얘기해도 누구나 기억할 만한 사건이 잇따랐다. 부산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사고를 시작으로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서울 성수대교 붕괴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이 떠오른다. 그런데 95년 6월 29일 오후 6시쯤이다. 당시는 서울시를 출입하던 때였는데, 시청에서 수도권 뉴스를 마감하고 마포 본사로 귀환하는 도중, 용산 전자상가를 지나는데 데스크로부터 연락이 왔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됐으니 곧장 현장으로 출동해서 생방송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다.
이 사고는 사망자 501명, 실종자 6명, 부상자 937명이 발생한, 8.15광복 이후 가장 큰 인적 재해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데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평생 잊지 못할 2명이 있을 것 같다. 서울시장을 지낸 최병렬과 고건씨다. 6월 29일 사고 당일은 지방선거일이었다. 30여년 만에 다시 실시된 지방선거였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큰 관심 속에 치러졌다. 그런데 잠정 개표결과 민주당의 고건 시장의 당선이 확실시되고, 임명직 마지막 시장인 최병렬씨는 세종문화회관에서 퇴임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붕괴사고로 퇴임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기자 출신의 최 시장의 현장 감각도 탁월하지만, 사고 자체가 워낙 컸다. 고건 당선자도 현장으로 왔다. 대략 저녁 7시 무렵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임명직 마지막 시장과 선출직 첫 시장의 업무인수인계가 시장실이 아닌 붕괴사고 현장에서 이뤄진 것이다. 최 시장과 고 시장은 붕괴현장 임시 지휘부가 마련된 119차량 지붕위에서 만났다. 아마 전-현직 시장이 그것도 임기 마지막날과 첫날 사고현장에서 만난 것은 삼풍백화점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사고 파급력이 워낙 커서 한 달 이상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지만 붕괴현장을 두고도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터가 안 좋다는 말이 돌았다. 백화점 터가 원래 상궁 나인의 무덤지였는데, 평생 임금 때문에 수절하고 죽은 여자의 한과 원이 서린 곳이라는 풍설(風說)이다. 또 사체 수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전자기파(電磁氣波)로 사체(死體)를 수습할 수 있다며 자칭 유명한 도인들이 현장을 다녀가기도 했다. 지금은 사고 현장 양지 바른 곳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백 선장은 살아있다
삼풍백화점 만큼이나 기억나는 현장이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다. 93년 10월 10일 훼리호 침몰사고가 났다고 해서 부안 격포로 출동했다. 292명의 사망자를 낸 대형사고다. 그런데 이 사고를 생각하면 잊혀지지 않는 것이 훼리호의 백 선장(船長)이다. 사고 나흘째 평소와 같이 기자실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마침 타사 기자들은 모두 취재현장으로 가고, 나는 방송준비로 기자실에 있었다. TV방송은 중계차에서 리포트를 하기 때문에 기자실은 주로 이용하지 않고 라디오 방송은 기자실 전화를 사용하기 때문에 취재시간외는 주로 기자실을 자주 이용한다. 지역의 선주 내지 선장 4~5명이 기자실에 왔다. 처음에는 뭔가 특별한 소식을 알려주려고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나와 몇 마디 나누는데 훼리호의 백 선장을 봤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주위에 기자는 한 명도 없다. 그들은 평소 백 선장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이고 진술 내용도 신빙성이 높다는 판단을 하고 즉시 리포트를 했다. 물론 특종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들의 진술에 따르면 해가 진 다음 당시 훼리호가 떠난 위도 선착장에 백 선장이 나타나 모자를 벗고 물기를 털면서 자기집 부근으로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그들 중 한명은 백 선장에게 말을 건넸지만 별다른 대답 없이 얼굴만 돌리더니 그냥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보도 이후 백 선장의 연고지 가운데 하나인 전주에서도 백 선장을 목격했다는 추가 진술이 나왔다.
당시 훼리호 침몰사고의 원인 규명의 핵심을 선장이 쥐고 있었기 때문에 백 선장의 생존과 향배는 사고 이후 최대 현안이었다. 당시 정읍지청에서 수사를 했는데, 이모 검사도 기자의 진술과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확인하고 대대적인 수색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리무중, 보름 이상 수색을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결국 백 선장은 침몰된 훼리호 선장실 키 부근에서 발견됐다. 침몰 순간 마지막까지 죽음을 넘어 배를 지켰던 것이다. 약 보름 정도 특종이 되었지만 백 선장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사실 앞에서는 유구무언,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물론 백 선장의 사망소식은 전했지만, 취재현장에서 느끼는 비장함과 같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비애감과 착착함을 가눌 수 없었다. 그 해 연말 특집 때 백 선장의 명복을 빌어드린다는 방송을 했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백 선장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