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언론인회 통도사 순례기-
박준영 / 시인, 방송인
가을이 익어 완전히 고개를 떨구는 시월 말 강신철 회장과 김종두 사무국장의 노고로 열대여섯 분의 일행은 직지사를 거쳐 통도사 자비도량에 도착한다. 해발 1,050m의 영축산으로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 해지기전 자장암의 금와(金蝸)보살을 보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한다. 금개구리보살에 얽힌 소임스님의 맛깔나는 설명을 듣고 서둘러 법당 뒤의 금와공(金蛙孔)에 눈을 바짝 갖다 댄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어두운 빈 구멍뿐. 기다리는 일행이 많아 자리를 양보한다. 뒤에 본 분들은 모두들 보인다고 탄성을 질러댄다. 하! 더 잘 보려고 너무 가까이 갖다 댄 내 욕심을 속으로 나무라며 다시 시도. 영락없이 엄지 손가락만한 금빛 나는 개구리 보살. 믿으면 보인다고, 금와보살과 인근 바위를 둘러싼 얘기가 그럴 듯하다. 가끔 울음소리도 들린단다. “이 놈들 똑바로 살아라” 호통 치는 소리 같이 말이다. 거북 바위는 앞에 있는 코끼리 바위에 꼼짝 못하고 그 코끼리는 쥐 바위에, 그 쥐는 뒤에 있는 호랑이가 겁이 나서 몇 천 년을 꼼짝 않고 버틴단다. 통도사 경내에 있는 구룡지(九龍池)에 얽힌 얘기하며 금와보살 얘기는 직업의식이 발동하기충분하다. 요즘말로 스토리텔링의 보고가 한국 고찰 여기저기에 넘쳐난다.
공양을 마치고 은은한 저녁 종송에 맞춰 범종루로 삼삼오오 모여든다. 중고등 학생에서부터 외국인, 대포 같이 생긴 카메라로 중무장한 아마추어 사진동호회원들과 두 손 모은 지극정성의 노보살 등 각양각색의 참배객들이 한마당 가득이다. 소, 말, 호랑이, 쥐 등 축생을 제도하는 법고무는 예술 그 자체다. 물속 중생을 제도하는 목어소리가 계곡물 소리에 화답하고, 이어 허공 중생을 제도하는 운판소리를 받아 지옥중생을 제도한다는 범종이 영축산에 고루 퍼진다. 서른세 번의 범종이 끝나갈 무렵 일행은 천여 명 이상이 들어가고도 남을 설법전으로 자리를 옮긴다.
사오십 여 분의 스님 외에도 우리일행, 부산부경대 템플스테이학생들과 신도들을 합쳐 백여 명 이상이 올리는 “지심귀명례”가 넓은 법당에 울려 퍼진다. 스님들의 예불송은 여느 다른 절과는 좀 다르게 들렸다. 개성이라 할까, 차별이라 할까, 천사오백 년 흘러 내려온 독특함의 전통이 흘러넘친다. 지관 총무원장스님의 이임식에 갔다 막 돌아오신 정우 주지스님이 예불이 끝난 법당에서 반갑게 맞이한다. 불력이 왕성하신 스님께 불사대사님하고 금강신문 이은윤 사장이 화답을 하고.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오래 지내면서 불교계에 많은 공헌을 남긴 공종원 선배, 언론인회를 이끌며 활성화 시키고 있는 강신철 회장, 직전 KBS 부산총국장이며 해설위원실의 이동식 실장과 MBC 논설위원실의 위원이자 언론사연합불자회장을 역임한 이연재기자 등 일행이 예를 올린다. 필자는 우리집사람이 구룡사에 다녔기에 간접으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졸시 한편을 남긴 게 스님과의 첫 인연의 시작이다.
오늘
내 전생이 무엇이었을까
내 미래가 어떻게 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현재 나를 보면 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였고
미래의 나다
어제도 내일도 없다
어제는 지난 오늘이고
내일은 다가올 오늘이다
오늘
그 오늘에 충실하라
현재 머무는 곳에
열심인 사람이
어제와 오늘, 내일의 주인이다
우주의 주인이다
다음날 아침공양을 같이 하신 후 스님은 친히 경내를 안내하셨다. 불사가 한창이었다. 법당보다는 생활공간 위주로 곳곳에 스님의 자상한 뜻이 배여 있음을 직감한다. 만여 명의 공양을 가능케 하는 공양간은 물론 행자나 공양주보살, 절 살림을 사는 거사들의 세탁장, 목욕탕, 잠자리시설 등 살기에 쾌적하게 해 부처님 섬기기에 온 정성을 쏟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야말로 생활불사, 복지불사라는 느낌이 배어온다.
통도사라면 뭐니뭐니해도 자장율사와 진신사리, 금강계단을 빼놓을 수 없다. 대한불교조계종 15교구 본사로 법보 해인사, 승보 송광사와 함께 불보(佛寶)사찰이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 신라가 통일 과업을 이루기 전 기반을 쌓은 선덕여왕 때(646년)에 자장율사는 중국 당나라에서 부처님 진골사리와 가사, 대장경 등을 금강계단에 봉안하고 통도사를 창건한다. 이후, 신라 율종의 근본도량이면서 신라 승단의 중심지가 된다. 절의 이름은 승려가 되려는 출가자들이 모두 금강계단에서 득도하거나 모든 법을 깨달아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또는 산의 형세가 부처님이 설법하던 인도의 영축산(또는 영취산)의 모습과 통한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인데 필자가 가본 바로는 형세자체만 말하면 영축도량 통도사의 산이 빼어나다고 할 수 있겠다.
모두들 대웅전(남쪽에는 금강계단, 동에는 대웅전, 서쪽에는 대방광전, 북쪽에는 적멸보궁이라는 각각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국보 290호)에 들러 삼배를 올린다. 부처님의 신골(身骨)사리를 봉안하였기에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허나 불상을 보고 절을 해오던 일반불자들에겐 잡히지 않는 허전함이 있다. 습(習)일까? 초기 불교에서는 불상이 없었는데 간다라미술의 영향으로 후에 불상을 모셨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는 있지만 말이다. 신에게 모든 걸 맡기는 유일신을 믿는 타력신앙과는 달리 자력으로 성불을 해야 하는 지극히 맞으면서도 어려운 불교와의 차이를 잠시 생각한다.
밖으로 나가 불사리탑에 삼배를 올린다. 탑 속인지 어딘가에 계실 사리는 보일 턱이 없으니 허공에 절을 올린다. 눈에 보여야, 손에 잡혀야, 귀에 들려야 성에 차는 가엾은 중생을 용서 하소서. 안이비설신의가 무상이요, 그 거죽을 둘러 쓴 내가 공(空)이 아니던가? 원래 허공이 부처요, 부처가 허공이던가. 잠시 고개를 들어 산을 바라본다. 몇 백 년 묵은 듯한 붉은 소나무가 협시불로 둘러 서 있다. 올라오는 숲길에 빼곡히 둘러선 소나무 길이 부처처럼 맞이해주더니 여기에도 소나무 숲이 영험스럽다. 그래서 통도사에는 베푸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차담을 나누던 정우 스님께서 두둑한 보따리를 하나씩 주신다. 통도사 주지시며 동국대 설립자이신 구하대종사의 민족불교운동 사료집이다. 그 동안 하마터면 친일 반민족 행위로 몰릴 법한 스님의 민족불교운동 사료를 낱낱이 모아 편집한 상하 2천 페이지에 달하는 묵직한 책이다. 후학 문도들의 정성이 알알이 박힌 방대한 자료다. 문밖까지 나와 배웅하는 스님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우리는 서운암으로 오른다.
통도사에는 자장암, 비로암, 극락암 등 여남은 개의 알토란같은 암자가 있다. 서운암에는 성파스님이 통일을 염원해 고려 팔만대장경을 도자기로 구워 대장경각에 보관키 위한 대장정이 소리소문 없이 진행 중이었다. 스님은 항일 독립운동사 자료를 조사하다 불교가 끼친 영향에 비해서는 그 자료가 부실해 독립운동사 전10권 책 중에 불과 몇 페이지 정도로만 기술되어 있다는 것에 크게 자극을 받고 통일을 염원하는 도판(陶版)대장경을 만들기로 원을 세운다. 성파스님은 도판기술에서, 가마기술까지 일본어를 직접 배워가며 기계를 도입, 통관에서부터 한전과의 고압선 끌어대는 작업, 최종적으로는 경판을 보관할 장경각의 건립 공사까지 진두지휘 했단다. 옻칠을 위해 국내 1년 생산량의 30년분에 해당하는 옻을 중국에서 수입, 옻칠 기술까지 익혀가며 11번째 칠을 마친 참이다. 경내에 풍기는 옻 냄새에서 그 동안 애쓴 흔적이 물신 묻어 나온다. 가로 1m에 두께 1.2cm의 경판을 16만 수 천여 장(목판과는 달리 한 면에만 새김으로)이 이미 대작업을 마치고 큰 창고에서 장경각으로 옮길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경내 주위엔 살구와 매화 등 봄꽃나무는 물론 이팝나무 등 여름, 가을, 철따라 피는 꽃나무 심는 공사도 시작돼 향기로운 통일염원 동산을 만들 꿈이 손에 막 잡히는 듯하였다. 크지도 않으신 키에 다부진 얼굴, 안내 내내 웃음을 잃지 않은 그 모습에서 좋은 일에 원(願)을 세워 굳은 신심으로 온갖 고난을 헤치며 용맹정진하는 성파 스님 등 통도사 스님들 얼굴을 그리며, 대저 속인의 욕망과 스님의 원은 어디에서 그 차이가 오는가하는 설익은 화두를 들면서 상경 길에 오른다.
지금도 서운암의 수천수백의 간장된장독은 영축산 아래의 지수화풍에 잘도 익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