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범죄추리소설은 이야기와 트릭의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묻는 데 초점을 맞춘 ‘후더닛(who done it)’ 계열, 범인보다는 범행을 어떻게 저질렀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하우더닛(how done it)’ 계열, 범인이나 범행수법보다 범행동기, 즉 범인은 어쩌다가 흉악한 괴물이 되었는가를 들여다보게 하는 ‘와이더닛(why done it)’류가 그것입니다.
후더닛이나 하우더닛은 대체로 캐릭터보다는 퍼즐처럼 정교한 두뇌게임으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합니다. 코난 도일의 고전 추리작품들처럼 후더닛은 탐정(셜록 홈즈)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홈즈와 쌍벽을 이루는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루팡 시리즈처럼 하우더닛 계열은 도둑 (범인)의 활약 즉 절묘한 범행 수법이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반면에 와이더닛 작품들은 아무래도 캐릭터의 사연에 천착합니다. 범인 혹은 수사관의 사연이나 행적서부터 내면의 갈등과 상처 등 인물의 일대기가 범행-수사의 스토리와 함께 펼쳐집니다. 근래에는 와이더닛 작품들이 더 많이 쓰이는 듯한데, 거기에는 다양한 배경이 있겠지만, 욕망이 작동하는 기제가 복잡해진 현대 사회의 일면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캐릭터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인물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추리소설의 선악구도는 복잡하게 얽힙니다. 가령 영미장르문학에서 두드러진 성취를 보여 온 하드보일드 범죄스릴러 작품들 가운데 널리 읽히는 작품들은 대개 유능하고 인간미 넘치는 탐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범인 역시 탐정과 맞설 만한 실력자이고 주인공 못지않은 매력과 인간적인 연민을 자아내곤 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희생자인지 책을 다 읽고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죄가 밉지 사람이 밉냐’는 식의 이분법적 이해의 논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 선과 악이 현실화하는 과정에 개입하는 복잡한 선악의 요소들을 배제한 채 그 연쇄의 마지막 악행만 심판하는 것이 과연 선인가 하는 다분히 실용적이고 법논리학적인 질문도 작품들은 제기하곤 합니다.
근래에 읽은 소설도 그러했습니다. 로마 교황청 내사원에 소속된 사면관의 존재를 모티프로 삼은 그 작품에서 작가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말과 생각을 통해 저 질문을 직설적으로 던집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범죄 기록을 보유한 곳이 교황청이라고 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확보된 죄의 고백 가운데, 살인처럼 평사제가 용서해줄 수 없는 대죄의 기록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해성사로 확인된 범행이 세속의 형사사법체계로 넘겨져 수사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황청은 수천 년에 걸친 그 기록을 통해 악의 근원을 탐구해왔다는 것입니다. 사면관은 세속의 법과 무관하게 범죄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동원되는 비밀 조직원인데, 그들에게는 내사원이 보관한 자료 중 자신에게 허락된 일부만 열람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고 합니다. “끔찍한 어둠의 세계를 모두 접하고도 멀쩡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사원 소속 사제들은 이렇게 믿었던 거야. 최대한 방대한 분량의 사례기반 추론집을 집대성하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악이 발현하는 순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악의 기운을 특정 범주로 분류하려 했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악은 언제나 술수를 부려 자신을 옭아매려는 도식을 피해나갔지. 예측이 불가능하도록 말이야. (…) 그렇기 때문에 연구직 사제나 기록 보관실 담당 사제, 그리고 사면관들이 수사관의 역할을 하면서 직접 사건에 개입해 불의를 바로잡으려 했던 거야. 그런 역할을 했던 사제들이 보물처럼 여겼던 기록 보관실이 남긴 가장 커다란 교훈은 악은 악을 낳을 뿐이라는 거야. 악의 기운은 무차별적으로 인간을 공격하는 일종의 전염병과도 같아. 사면관도, 자신 역시 인간으로서 악이 발현하고 전염되는 과정에서 결코 무사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지.” (도나토 카리시 <영혼의 심판> 2권 172쪽) 소설 속 연쇄살인마는 사면관입니다. 그는 범인을 찾아내 처벌을 받게 하면서 스스로도 악인이 되어갑니다.
사실 저 같은 선악의 내면이 새로운 통찰은 아닙니다. 니체는 그의 저서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에 이렇게 썼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소설이나 범죄심리학 문건 등에서 하도 빈번히 인용돼서 이제는 ‘클리셰’가 된 저 문장 안에는 선악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복잡하고 개별적인 맥락이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악은 전혀 특별하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또 우리 안에 상존한다는 사실을 통찰한 학자들의 책도 이미 여럿입니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막스 피카르트 <우리 안의 히틀러> 등)
아시다시피, 추리소설은 선명한 권선징악의 서사 전통 위에서 발전해왔습니다. 범인은 단죄되고 정의는 승리한다는 명쾌한 논리입니다. 제가 추리소설 속 선악의 문제를 장황하게 전한 까닭은, 심지어 그 추리문학에서조차 선악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달라진 탓이라기보다 인간이 인간의 본질을, 선악의 실체를 좀 더 깊이 인식하게 됐음을 의미하는 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성찰과 자성도 그만큼 깊어졌는지, 인간이 얼마나 겸손해졌는지는 의문입니다.
또 저는 저 선악의 모호함이 정의의 부실함을, 판단의 모호함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선을 고양하고 악을 징벌하는 것이 (법의) 정의입니다. 부당하게 많은 것을 누리거나 박탈하는 것을 막는 것이 (분배의) 정의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개별적으로 존중 받고, 돈이나 힘이나 지위 따위에 의해 개인성을 침해 받지 않도록 보장하는 것이 (사회) 정의입니다. 돈이 선이고, 힘이 선인 세상에서 정의는 설 자리를 잃습니다.
세계성공회공동체 수장인 저스틴 웰비 영국 켄터베리 대주교가 이달 초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에 참석해 한 연설이 저 말이었습니다. 그는 “정의가 사라지면 희망도 없습니다. 정의가 존중 받으면 가난한 자들이 희망을 가지며, 온 세상이 즐겁게 노래하기 시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웰비 대주교의 지적처럼, 정의는 희망의 토양이고 희망의 토양은 현재의 부당함이 정당하게 개선될 것이라는 사회적 약속입니다. 물론 저 가난은 물질적 가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보수든 진보든 근대의 모든 사상들은 저 단순 명쾌한 윤리적 전망 안에서만 유의미합니다. 그 정의가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웰비 대주교의 경고는, 우선은 오만하게 비대해진 교회와 교회 성직자를 겨냥한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사회 전체의 자성을 촉구하는 경고일 것입니다.
영국 작가 존 버거는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선악이 모호해진 세상이지만 기어코 정의의 가치를 지켜가겠다는 의지가 저 희망의 씨앗일 것입니다. 내세의 약속보다 어쩌면 바로 거기에 종교의 현대적 의미가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