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금강경』은 스승과 제자의 대화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일전에 만난 어느 분이 어느 목사님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인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승과 제자의 대화가 『금강경』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란다.
우리는 좀 경직된 자세로 불경을 읽게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사실 딱딱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아니다. 부처님이 수보리 존자를 크게 칭찬하면서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설하는 대목을 감상해본다.
佛言 善哉善哉 불언 선재선재
須菩提 如汝所說 수보리 여여소설
如來善護念諸菩薩 여래선호념제보살
善付囑諸菩薩 선부촉제보살
汝今諦請 當爲汝說 여금제청 당위여설
善男子 善女人 선남자 선여인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應如是住 응여시주
如是降伏其心 여시항복기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바와 같아서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하며
여래는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느니라
그대는 지금 자세히 듣도록 하라
그대를 위해서 말해주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샤막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안정되게 머물도록 하고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느니라.
규봉스님은 ‘선재’라는 말을 반복해서 쓴 것은 찬미의 극치라고 풀이하고 있다. 수보리가 무엇을 어떻게 질문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는 대중들과 후오백세의 불제자들을 위해서 “어떻게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 하는 질문을 드리자 스승이 아낌없이 칭찬을 하면서 대답을 하고 있는 토크쇼를 지금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육조스님의 풀이를 자세하게 소개한다.
是佛讚嘆須菩提 시불찬탄수보리
善得我心 善知我意也 선득아심 선지아의야
이것은 부처님께서 수보리가
나의 마음을 잘 알고
나의 뜻을 잘 알아차린 것이라고
찬탄한 것이다.
설명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설명을 듣는 사람이 말로 하지 않은 것까지 깊이 헤아려서 척척 알아차려주면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한 풀이가 뒤를 잇는다.
阿之言 無 아지언 무
耨多羅之言 上 욕다라지언 상
三之言 正 삼지언 정
藐之言 徧 먁지언 변
菩提之言 知 보리지언 지
‘아’라는 말은 무無이고
‘뇩다라’라는 말은 상上이고
‘삼’이라는 말은 정正이고
청정淸淨한 한 해를 보내면서
‘먁’이라는 말은 변.이고
‘보리’라는 말은 지知이다
우리가 ‘뇩’으로 읽고 있는 글자는 사실은 김맬 누자이다. 범어도 ‘아눗다라’이다.
요즘 어떤 책에서는 ‘아누다라’로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언어의 습관이라는 게 묘해서 ‘아뇩다라’ 하고 발음하면 힘도 들어가고 하는 데 ‘아누다라’ 하고 읽으면 어딘가 모르게 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無者 無諸垢染 무자 무제구염
上者 三界無能比 상자 삼계무능비
正者 正見也 정자 정견야
徧者 一切智也 변자 일체지야
知者 知一切有情 皆有佛性 지자 지일체유정 개유불성
但能修行 盡得成佛 단능수행 진득성불
佛者 卽是無上淸淨般若波羅蜜也 불자 즉시무상청정반야바라밀야
‘없다’는 것은 모든 번뇌의 때와 오염이 없다는 것이고
‘위’라는 말은 삼계에 비교대상이 없다는 것이고
‘바르다’는 것은 정견이며
‘두루하다’는 것은 일체지이고
‘안다’는 것은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어서
단지 수행하기만 하며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부처님’은 위없이 청정한 반야바라밀이다.
무상정변지를 얻고자 마음을 일으킨 선남자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 항복받아야 하는가. 저 먼 과거에 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질문한 것으로 끝난 문제가 아니고 지금 이 시대의 불자들이 던져야 할 물음이며 앞으로도 자손만대 대대로 묻고 또 묻게 될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무상정변지로 가는 걸음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좀 안락하고 편안하고자 하는 신발을 운전하고 있는가.
是以 一切善男子善女人 시이 일체선남자선여인
若欲修行 약욕수행
應知無上菩提道 응지무상보리도
應知無上淸淨般若波羅蜜法 응지무상청정반야바라밀법
以此 降伏其心 이차 항복기심
그러므로 모든 선남자 선여인이
만약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무상보리도를 알아야 하며
마땅히 위없는 청정반야바라밀법을 알아야 하나니
이를 통해서 그 마음을 항복받을 수 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눈으로만 읽고 있는가. 아니면 눈썹 끝까지 뻗어있는 모세혈관의 혈액까지 총 동원해서 발가락과 손가락 끝의 모세혈관과 함께 읽고 있는가. 경전을 읽을 때 심장이 퍼덕퍼덕 거리고 있는가. 심장은 그냥 일상적으로 있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야구 경기에서도 타자들이 9회가 되면 눈동자가 달라진다. 경전을 읽고 고전을 읽는다고 하는 나의 눈동자는 어떤 상태인지 눈을 잠시 감고 점검도 해볼 일이다.
唯然者 應諾之辭 유연자 응낙지사
願樂者 願佛廣說 원요자 원불광설
令中下根機 盡得開悟 영중하근기 진득개오
樂者 樂聞深法 요자 요문심법
欲聞者 渴仰慈誨也 욕문자 갈앙자회야
‘예 그렇습니다’ 하는 말은 응낙하는 말이다.
‘원컨대 기꺼이’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시어 중근기와 하근기도 모두 개오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좋아한다’는 말은 깊은 법문 듣기를 좋아한다는 것이고 ‘듣고자 합니다’라는 말은 목마른 심정으로 자비로운 가르침을 우러러 기다린다는 뜻이다.
수보리 존자의 간절함과 절박함과 선남자 선여인을 위해 배려하는 마음이 시공을 초월해서 강력한 주파수를 아직도 여전히 뿜어내고 있다.
또 한해가 저문다. 새해가 온다. 세월이 가건 오건 저 수보리 존자의 간절함으로 한구절 한구절 경전도 읽고 고전도 읽어야겠구나 생각을 가다듬어본다. 은행나무가 우수수 잎들을 떨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