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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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初心)을 잃지 않는 불자(佛子)가 되자

얼마 전,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가 잠시 숨을 고르듯 잦아들자 통도사를 외호하듯 군락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길을 따라 산책삼아 연꽃방죽을 둘러본 적이 있습니다. 통도사에서 한 식구처럼 같이해왔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별 느낌 없이 대해왔는데, 비가 갠 뒤 드러난 소나무의 자태는 하나하나마다 천차만별(千差萬別)의 모습을 하고 있음이 새삼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간의 삶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인간의 삶 역시 소나무 군락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각자의 위치와 처한 현실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형태 또한 다릅니다. 매일의 생활을 분주하고 바쁘게만 사는 사람, 자로 잰 듯 정해진 대로 살아가는 사람, 들쭉날쭉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 언제 어디로 튕겨져 나갈지 모르게 사는 사람….

이렇게 천태만상(千態萬象)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삶의 목적은 모두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그렇게 천태만상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45년간 팔만장교(八萬藏敎)의 법을 설하셨지만, 그 귀결점(歸結點)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자리에서 살자는 것으로 요약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마음 잘 쓰고 잘 다스리면서 항상(恒常)한 나의 모습으로, 언제나 즐거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얼마 전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이 불교TV에서 법문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스님은 그 법문에서 ??내가 상처받고 속이 상하고 화가 잔뜩 났거들랑 상대방에게 말을 하라. 말하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편지라도 써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 힘듭니다. 사랑하는 이여 내가 화가 나 있습니다. 화가 난 연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내가 이렇게 화가 나 있을까요? 아니면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화가 나 있습니까? 왜 그렇게 짜증을 내십니까? 왜 이렇게 신경질을 내십니까? 왜 이렇게 힘들어 하십니까?」
이렇게 편지를 쓰거나 말을 하되, 절대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존심(自尊心)을 가지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나라고 하는 자아(自我)는 결국 무아(無我)입니다. 그러나 나라고 하는 그 마음에 상일성(常一性)과 주재성(主宰性)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나라고하는 그놈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마음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스스로 나라고 하는 그놈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그놈이 일으키는 분별상(分別相)이 바로 자존심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존심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결국 항상한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법신(法身)을 지니고 살아가자는 것이요, 늘 즐거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열반(涅槃)의 세계에 들자는 것입니다. 즉, 12처(十二處)와 18경계(十八境界)의 삶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채득하여 항상된 나, 즐거운 나,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자리의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부처의 성품을 잃어버리지 않는 참나의 모습으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나와 개합되어서 둘이 아닌 자리에서 사는 깨끗한 나로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12처는 6가지 감각기관과 6가지 감각대상을 합친 것을 말합니다. 즉,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말하는 것으로,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그 대상인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을 말합니다. 또 18경계는 일체의 존재를 인식기관인 6근(根)과 인식대상인 6경(境), 그리고 인식작용인 6식(識)으로 분류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생각을 바꾸면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라는 말씀입니다.

짚신장수와 우비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의 우화(寓話)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짚신장사와 우비장사를 하는 두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평생을 두 아들 걱정 때문에 눈이 짓물러서 결국 실명위기에 까지 몰리게 되었답니다. 그 어머니는 날이 좋은 날은 우비장수 아들이 걱정이었습니다. 또 비가 오는 날은 짚신장수 아들이 걱정이었습니다. 날이 좋은 날은 우비가 안 팔릴까봐 우비장수 아들이 걱정이고, 비가 오는 날은 짚신이 안 팔릴까봐 짚신장수 아들이 또 걱정이었습니다. 그렇게 늘 걱정만 하면서 살아가니, 눈병이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을 한 번만 바꿔 보면 어떨까요?
??비오는 날은 우비장수 아들 우비 많이 팔려서 좋겠고, 날 좋은 날은 짚신장수 아들 짚신 많이 팔려서 좋겠네.??
생각의 차이가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통도사(通度寺) 연꽃방죽에도 어느덧 연꽃이 만개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 손가락 마디만한 크기의 꽃대롱이 막 올라오려는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방죽 물을 다 뒤덮고도 모자라 이제는 잎끼리 서로 겹치고 꽃대는 서로 경쟁하듯 하늘로 치솟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성불(成佛)이라는 불종자(佛種子)의 씨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작은 불씨 하나가 인화물질에 붙으면 천하를 태우고도 그 불기운이 남는 이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 불종자의 씨가 성불이라는 꽃으로 만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또 어렵지도 않습니다. 나쁜 법(法)은 행(行)하지 않으면 됩니다. 늘 참회(懺悔)하면 됩니다. 항상 은혜(恩惠)를 생각하고 은혜를 짓는 삶을 살면 됩니다.
자식된 도리로 부모님께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아 돌아가신 뒤에 후회를 합니다. 살아계실 때 잘해드릴 걸 하고 후회해본들 이미 그때는 늦은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 어느 때든 초심(初心)의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처음 가졌던 고마운 마음, 감사하는 마음, 기쁜 마음, 즐거운 마음을 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법을 들으면 항상 배우려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날이 따뜻해지기 시작한 어느 날 앞뜰에 벌이 날아 들어오더니 집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요즘 나는 그 벌을 보면서 또 많은 공부를 합니다. 승가(僧家)의 공동체(共同體)처럼 공동체 활동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무진법문(無盡法門)을 지금 듣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에게는 법문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가르침이든지 배워야 합니다. 안 되는 집은 잔칫상을 차려놔도 손님은 둘째 치고 거지도 안 오지만, 되는 집은 거지가 모여도 모인다고 했습니다. 그 되는 집의 모습도, 안 되는 집의 모습도 결국 내가 어떻게 마음을 먹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다가 나뭇잎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서 손바닥에 얹어놓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큰 느티나무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과 내 손바닥에 있는 이 나뭇잎 중 어떤 것이 더 많으냐?』
그런데 아난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저 느티나무 잎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느니라. 내가 45년 동안 법을 설한 것은 내 손바닥에 쥐어있는 나뭇잎보다 적고 내가 말하지 못한 가르침은 저 느티나무 잎보다 많으니라.』
아주 멋진 법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배우려고 하지 않고 부처님 말씀이 어렵다고만 합니다.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나뭇잎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이 팔만장교의 가르침을 설하신 내용은 손바닥에 놓여있는 나뭇잎보다 적고 제자들에게 설하지 못한 가르침은 저 느티나무 잎보다 많다는 겁니다.
듣고 보면 내용은 별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에 연결하고 붙이고 첨삭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고 또 배워야만 합니다.

또 해야 할 일은 옛것을 잊지 않고 새것을 짓는 일입니다. 옛것을 닦고, 법문 듣기를 좋아하고, 가르침 말하기를 좋아하고, 질문을 잘하고, 답변을 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을 잘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고, 답변을 잘하는 것은 선지식의 몫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잘 물음으로 인해서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라는 법륜(法輪)이 운전되고, 무명(無明)이 행(行)을 낳고 행(行)이 식(識)을 낳고 식(識)이 명색(名色)을 낳고 명색(名色)이 육처(六處)를 낳고 육처(六處)가 촉(觸)을 낳고 촉(觸)이 수(受)를 낳고 수(受)가 애(愛)를 낳고 애(愛)가 취(取)를 낳고 취(取)가 유(有)를 낳고 유(有)가 생(生)을 낳고 생(生)이 노사(老死)와 온갖 불행을 낳는다』는 12연기(緣起)의 설법을 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와 어떻게 어울려 살고,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으로부터 시달리지 않고, 시달림을 주지도 않으면서 부처님의 법문을 제대로 배워서 있는 현상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초심자들이 불교에 처음 입문했을 때 바른 법을 배워야 하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처음 배우고 믿었던 바른 법과 바른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여, 일상적인 삶 자체가 항상 초심의 마음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불자의 삶이요, 자세일 것입니다.


<발문1>
나라고 하는 마음에 상일성(常一性)과 주재성(主宰性)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나라고하는 그놈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 마음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스스로 나라고 하는 그놈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아닌 그놈이 일으키는 분별상(分別相)이 바로 자존심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존심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발문2>
초심자들이 불교에 처음 입문했을 때 바른 법을 배워야 하고 바른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처음 배우고 믿었던 바른 법과 바른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여, 일상적인 삶 자체가 항상 초심의 마음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불자의 삶이요, 자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