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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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마음을 지닌 불자가 되자



  정우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불교가 인생과 다르지 않듯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간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서 서로가 서로를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육도윤회(六道輪廻)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직하는 불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어찌 보면 간단하지만, 이 진리를 중생심으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살기가 쉽습니다. 마치 비몽사몽(非夢似夢) 간에 꿈인지 생시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당나라의 영가 현각(永嘉 玄覺)스님은 《증도가(證道歌)》에서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니,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로다」 즉, ‘꿈속에서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또렷이 있더니, 깨고 나니 비고 비어 아무것도 없다’고 한 겁니다.
따라서 불자라면 스스로 얽힌 매듭을 풀 듯,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만 합니다.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공유되어 있지만, 사람에 따라서 어디에 있을 때는 지루하고, 어디에 있을 때는 시간이 빨리 가고, 또 어디에 있을 때는 기쁘고, 어디에 있을 때는 슬프고, 어디에 있을 때는 즐겁고, 어디에 있을 때는 고통스러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렇게 느끼는 전후작용은 결국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이치를 알아야 할 것 입니다.
얼마 전 개통한 KTX 울산역(통도사) 명칭에 대한 소동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울산역에 통도사라는 이름이 붙으면 어떻고 안 붙으면 어떠냐고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울산지역 기독교의 반발로 통도사가 명칭에 빠진데 대해서는 통도사 주지의 입장에서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결정은 국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그리고 이용자 편익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통도사(通度寺)는 1365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께서 절을 세워, 신라의 국법을 기초하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이바지 한 사찰 입니다.
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7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명대사(四溟大師)와 영규대사(靈圭大師)를 중심으로 한 승병(僧兵)이 호국(護國)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 도량이기도 했습니다.
산세가 연꽃처럼 첩첩이 쌓여있어서 길 하나만 막으면 천연 요새(要塞)가 되는 밀양 표충사(表忠寺)에 설치된 승병훈련소에 농사지은 곡식을 짊어지고 영축산을 넘어 군량(軍糧)으로 가져다줬던 것입니다. 이로 인해 통도사는 왜군에 의해 몇 채의 전각을 빼놓고 다 불에 타는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때 대웅전도 함께 전소되어 이후 50여 년 동안은 대웅전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의 대웅전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고, 지금으로부터 365년 전에 다시 세워진 법당입니다. 경봉(鏡峰) 노스님이 계셨던 극락암도 당시에 전소되었고 천성산에 있는 내원사 등 89개 사찰 중에 81개의 절들이 불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어찌 절만 불탔겠습니까? 당시 승군으로 활동했던 스님들은 또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하고 피해를 입었겠습니까?
특히 전쟁이 끝난 뒤 사명대사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국교정상화를 위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3500명의 포로를 송환해왔으며, 약탈해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되찾아 오는 등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되살리는데 혁혁한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요즘 사회에 자주 회자되고 있는 국격(國格)을 세우는 데에도 1등공신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왜군에 의해 유린되고 약탈되어졌던 통도사 사리탑의 사리도 사명대사가 되찾아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명대사는 7년간의 전쟁을 치르고 또 일본에 건너가 수많은 고초를 겪으셨음에도 일본에 가시기 전에 통도사에 오셔서 직접 사리탑을 복원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통도사 뿐 아니라 수많은 사찰이 전란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도, 통도사로 오셔서 복원불사를 하셨을까요? 통도사의 역할이 그만큼 크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일제 때 통도사는 또 독립운동의 양산지역 본거지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박물관이 있는 자리는 통도사에서 세운 통도중학교가 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일제는 기미년 만세운동 때 통도사와 통도중학이 지역 청년들과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이유로 통도중학교를 폐교시켜버렸습니다. 통도사와 통도중학교가 얼마나 일제에 항거했으면 기미년 만세운동으로 폐교 가 되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6.25 전란 때 통도사는 국군야전병원 이기도 했습니다. 군인들에게 병원으로 쓸 수 있도록 절을 내준 것입니다.
이처럼 통도사는 우리나라 흥망성쇠의 현장에서 국난을 극복하는데 앞장섰고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전우 같은 관계 입니다. 또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도 국보와 보물 등 4만 여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입니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보고이자 산실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사찰을 불교단위사찰로 취급하고, 말이 되느니 안 되느니 시시비비를 논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엉클어진 실타래의 매듭은 스스로 풀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통도사를 찾는 불자들이 KTX 많이 이용하면 자연스럽게 원하는 대로 될 것 입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참된 나를 찾지 못하고 끝없는 방황과 갈등, 고통과 괴로움으로 자신의 소중한 삶을 낭비하고 탕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자신의 소중한 삶을 출혈이 아닌 헌혈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탕진하지 말고 저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행정진은 우리를 본래성품 자리로 이끌어 가는 방법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매사에 초조해 합니다.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인해 일어나는 장애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거기에 함몰된 삶을 살면 안 됩니다. 유심(唯心)입니다. 마음에서 다 조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생각생각이 보리심임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극락세계에 따로 갈 것 없습니다. 내가 머무르는 곳이 극락정토입니다. 생각생각이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 찌들어 있으면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머무르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생을 사는 게 옳은 일이겠습니까? 불자로서 지혜롭고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경직되고 단절된 마음을 버리고 유연한 마음을 찾기만 하면, 부처님처럼 그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편안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자세라면 두려울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생각은 어디에 살든 어디에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내 스스로가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소중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내 부모 소중한 줄 알면 남의 부모, 내 가족 소중한 줄 알면 남의 가족, 내 종교 소중한 줄 알면 남의 종교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하고 내 돈이 소중한 줄 알면 남의 돈도 소중한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세상 사람들은 남의 것은 빼앗으려고만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불자들이라면 거기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쁜 업은 멀리하고, 나쁜 행동은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세로 선행을 쌓으면 마음은 항상 편안할 것입니다. 선근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혜롭게 산다는 게 그런 것입니다.
흔히 불교를 이야기 할 때 마음을 말하지만, 그 마음을 알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마음이 너그러우면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일 수 있어도 옹졸하고 옹색하면 바늘하나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려는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치우치고 얽매이고 빠지고 집요하게 집착하려는 것은, 본래 집착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임을 잊지 말고 살았으면 합니다.
한 가지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매이지 말고, 좀 더 넉넉하고, 자유롭고,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불자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