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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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정진에 게으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석가여래 팔상상도(釋迦如來 八相相道)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이니라.


사찰의 영산전(靈山殿)이나 팔상전(捌相殿)에 가서 보면 부처님의 생애를 8폭의 탱화로 조성하여 모셔놓은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탱화를 팔상도(八相圖)라고 하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폭으로 구분하여 그린 것입니다.
그 중 첫 번째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인간세계에 하강하시는 장면으로, 마야부인(摩耶夫人)의 꿈속에서 흰 코끼리를 타고 태중으로 들어오시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어 두 번째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으로, 싯다르타태자가 룸비니동산에서 태어나 사방으로 7보씩 걸으시며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요, 삼계개고(三界皆苦)하니 아당안지(我當安之)하리라”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서 유아독존의 “아(我)”자는 2인칭 복수로써 “우리 아(我)”자입니다. 즉, 나 혼자만이 세상에서 존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모든 생명체는 다 소중하고 존귀하다는 말씀입니다. 인류에 평등사상(平等思想)의 인간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참 문학이고 극적이며 시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어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으로, 조선시대 때 한양(서울)에 사대문이 있듯이 카필라성에 있던 사대문을 돌아다니면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모습을 보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문에서 고행자의 모습을 보시고, 얽매이거나 치우치거나 빠지지 않은 수행자의 참 모습을 떠올리며 출가를 결심하는 과정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음력으로 납월 팔일은 부처님께서 성도(成道)하신 날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분으로 변화하신 날입니다. 모든 이들을 품안에 안아주시기 위한 준비된 날입니다. 사월초파일이 불종자(佛種子)의 씨앗이 된 날이라면, 성도일은 불종자가 꽃피워진 날입니다. 그리고 열반(涅槃)하신 날은 열매를 거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열매를 따다가 각각의 종성을 지닌 이들이 불종자를 심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들도 이처럼 움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보여주신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 후보자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그런데 북문에서 고행자를 만남으로 해서 출가해야겠다는 마음을 내셨다고 했는데, 한 번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똑같이 24시간을 반복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시간이 지루한 사람도 있고 편안한 사람도 있습니다. 한 잔의 차(茶)를 놓고도 목마른 사람과 배부른 사람이 그 차를 마신다고 했을 때 먹는 속도는 다를 것입니다. 차가 아니라 곡주 한 잔을 놓고도 즐기는 사람과 체질적으로 안 받는 사람은 잔을 비우는 속도가 다를 것입니다.

질량의 법칙은 상대적입니다. 결국 힘의 논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것은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해서 2월 8일 출가를 하셨는데, 그때 나이가 29세였습니다. 그리고 6년 동안 가도가도 끝이 없는 길을 걸어 고행자나 수행자들이 많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신 곳이 지금의 부다가야인데, 그 모습을 그린 그림이 다섯 번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입니다. 6년간의 고행 끝에 선정에 들어가자 마구니의 유혹이 심했으나 마침내 마구니의 항복을 받는 대목 입니다.
가끔 저는 40년 넘게 출가자의 길을 걸어온 시간을 되돌아보곤 합니다. 여한 없이 그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 것에는 나 자신에게 고맙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중생심이 작용한 인간적인 고뇌는 아직도 잔설이 되어 남아 있으나 후회는 없습니다.
법문을 준비하다 경전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부분들을 보게 되면 그날 저녁은 좋아서 잠 한숨도 못 이루기 일쑤 입니다. 내가 이렇게 좋은 데 이 가르침을 불자들에게 전해 드리면 얼마나 좋아할까 싶어서, 누구에게든지 어서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태자의 신분이었습니다. 출가를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를 이어 카필라국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그러한 위치에 있었던 부처님이 6년 고행으로 인해, 머리를 만지시면 파뿌리 뽑히듯 하고 얼굴을 쓰다듬으면 덜 익은 오이 쥐어뜯어서 그늘에 말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거쳐 성불을 이루신 후 부처님께서는, 『과거의 어떤 고행자나 수행자도 이런 일은 할 수 없었고 앞으로 어떤 수행자나 고행자도 이런 일은 해서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
마음이 상해서 “이제가나 다음에 가나 똑같은 이 세상 일찍 하직하지.”라고 독한 마음을 먹어보지만, 불행하게도 또 태어납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를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것 역시 그에 못지않은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내 팔 내가 흔들고 내 것 내가 먹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화엄경(華嚴經)》에서 『남의 물건을 많이 훔친 사람은 빈궁하거나, 있어도 못 쓴다』고 하셨습니다.
나 혼자만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사바세계 중생들은 누구나가 갈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번뇌(煩惱)이고 망상(妄想)입니다. 그것이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들입니다. 부처님도 성불하시기 직전에 호명보살(護明菩薩)로 계시다 오셨지만, 복덕(福德)과 지혜(智慧)가 구족(具足)해서 사바삼계(娑婆三界)에 대도사(大道師)가 되셨지만, 그런 부처님도 보리수 아래에서 마구니를 조복받는 대목에서는 갈등을 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마구니가 유혹하기를, “태자시여, 집으로 가시면 야소다라 라는 절세미인과 라훌라 라는 금쪽같은 자식이 기다리고 있고 임금도 될 것이고 전륜성왕이 될 것이고 이 세상을 다 알아서 할 수 있는 복력을 지니신 이가 왜 굶어 죽으려 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러한 마구니를 조복받았습니다.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늘 하루하루를 천년만년 살 것처럼 힘차게 일어나서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자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열심히 살자는 말씀입니다. “이러나저러나 가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늙어가는 꼴도 보기 싫고, 병들어 가는 꼴도 보기 싫고,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꼴도 보기 싫다”는 생각을 한다면, 지금보다 못한 인생으로 태어납니다. 그러한 생각이 들거들랑, 그 순간부터 남은 시간이라도 더 열심히 살겠다는 마음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고, 더 복 지으면서 살고, 더 나누면서 살고, 더 다독거려 주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루신 이후 21일 동안 선정에 드셔서 지금까지 있었던 인연들을 관찰해 봅니다. 그리고 함께 수행하다 수자타로부터 유미죽 한 그릇을 공양 받는 모습을 보고 타락하였다고 떠난 교진여(僑陳如) 등 다섯 고행자가 있는 녹야원(鹿野園)으로 찾아가 최초의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선언하십니다.
『길을 떠나자.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조리 있는 말로 알아듣도록 설하자.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고 두 사람이 함께 가지도 말자. 모든 이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길을 떠나자. 나도 우루벨라 병장촌에 가서 법을 설하리라.』
그 장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일곱 번째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입니다.
부처님은 길에서 태어나서 길에서 사시다가 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또한 길가에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을 설명할 때, ‘계는 그릇과 같고 정은 맑은 물과 같고 혜는 비치는 그림자와 같다’고 합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지 컵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물은 그릇이 있어야 마실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행자로서 이 몸을 버리고서는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함께 공부하던 이들은 타락했다고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49년 동안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뜬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있기는 있는데 허상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러한 뜬구름 같은 시간이라는 현상을 어떻게 갈무리를 쳐야 할 것인가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법문을 하시는 동안 자존심 때문에 먼발치에서 따라오고 있는 외도(外道)를 보고 아난(阿難)을 보내 그 노인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물어라. 자존심 세우지 말고 지금이 물을 때이니 물어라.』
그 외도는 부처님께 묻고 싶어 수백리를 따라 왔으면서도 아상(我相) 때문에 부처님 앞에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아셨기 때문에 가까이 오게 하셨습니다. 그 노인이 바로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수발다라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장교의 가르침을 나눠보면 성문소승(聲聞小乘) 연각중승(緣覺中乘) 보살대승(菩薩大乘)이라는 것이 있지만, 사실은 일불승(一佛乘)이고 일불승은 원교(圓敎)입니다. 그래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와 정견(正見) 정사유(正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팔정도(八正道)의 도리를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게 하고, 12연기(十二緣起)의 인연을 통해서 연각중승(緣覺中僧)의 깨달음을 이루게 하고, 또 육도만행(六度滿行)과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게 해서 보살을 이루게 하고, 십바라밀(十波羅蜜)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고 이해하고 실천덕목을 세워서 증득하는 이런 과정들을 다양한 방편을 들어서 공부하게 하는 이치들이 아닐까 합니다.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 이라고 했습니다.
티끌같이 많은 국토에 가득한 중생들의 마음을 모두 헤아려 알고 큰 바다의 물을 한 방울도 남지 않게 다 마셔 버릴 수도 있으며 허공의 무게를 달고 바람을 얽어 묶어두는 재주가 있다고 하여도 부처님의 공덕을 말하는 데는 능히 다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자 모두는 수행에 수행, 정진에 정진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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