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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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회주


40여 년 전, 당시 통도사를 찾아가기 위해 용산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물금역에 내렸는데, 역무원이 나더러 벌금을 내라고 해서 “왜 벌금을 내야 합니까?”하고 물으니까 진영표를 가지고 물금역에서 내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표는 얼마인데요?”하고 물었더니 똑같이 190원이라 합니다. “나는 통도사를 가야하기 때문에 여기 물금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값도 차이가 없는 진영역표를 사서 물금역에서 내릴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하니,“통도사 가려면 양산 읍내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되는데, 꼭두새벽이라 혼자 걸어가게 할 수도 없고 해서 말을 걸어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190원이라는 액수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절박하게 각인되면 그렇게 오랫동안 기억이 남는구나”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지나온 시간들이 얼마나 아쉽고 미진하고 부족한지를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기에서 포기하거나 좌절하거나 체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남은 그 시간이라도 좀 더 열심히 한걸음한걸음 무소의 뿔처럼 살아가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필요합니다.


『붓다 브레인』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보면, “뇌를 바꾸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음을 바꾸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마음은 놔두고라도 뇌만 가지고 생각해보아도 뇌는 정신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아이고 이놈의 정신머리” 할 때는 머리를 쥐어박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고 할 때는 가슴을 칩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정녕코 그 주변에 있기는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매화꽃이 아름답다고 나뭇가지를 잘라서 그것을 쪼개보면 매화꽃이 나올까요? 뇌에서 정신을 찾겠다고 뇌를 해부해보면 그 안에서 정신이 나올까요? 가슴을 열어서 보여준다고 거기에서 마음이 나올까요?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번뇌의 불길을 끈 상태’를 『열반경(涅槃經)』이나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선가구감(禪家龜鑑)』에서는 “해탈(解脫)”, “열반(涅槃)” 등으로 표현합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번뇌(煩惱)를 끊는 것은 해탈이라고 하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번뇌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번뇌의 불(火)을 꺼야하고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까?


해탈을 하면 참 자유를 누린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참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방종이 되겠지만, 근본을 잃지 않고 자기 도리를 다하고 내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다시 말하면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지금 누가 나를 붙들고 있습니까?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들고 있다면 내가 컵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을 마신 뒤에도 컵을 놓지 않고 계속 들고 있다면 내가 컵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참 자유를 누리고자한다면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구도 나를 붙들 수도 없을뿐더러 붙들고 있지 않습니다. 각자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붙들고 있습니까? 붙들려 있습니까? 누구인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에 붙들려있지 말고, 자유로워지십시오.


30여 년 전에 혼자서 인도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인도성지순례를 가면서 1300년 전에 혜초(慧超)스님이 걸어서 성지순례를 하고 써놓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라는 책을 가지고 가면서 혜초스님이 느낀 자리에서 제 감정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그때 바닷가 모래백사장에서 바닷물을 철썩철썩하니까 그 기운이 인도 남쪽으로 해서, 남지나로 해서, 베트남 옆과 홍콩 옆과 대만 옆을 지나서, 제주도를 거쳐 낙동강 쪽으로 와서 양산천을 지나니까 통도사 내 방 앞에 와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가온 시간이 2~3분 정도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한편의 시를 적어 보았습니다.


붉어진 입술 가까이 오면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정(情)은 옮겨 다니는 유행병이라는데
어디로부터 슬픈 얼굴은 바람 되어 다가오고
누가 이 저녁
석류 알 벌어지는 가슴으로
사랑을 노래하는가
하늘은 온통 마른 풀잎으로 타고 있네


그리고 성지순례 길에 혜초스님의 시를 외워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 하나가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쓰신 시입니다


보리수가 멀다고 걱정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그리 멀다 하리오.
가파른 길 험하다고만 근심할 뿐
업연(業緣)의 바람 몰아쳐도 개의찮네.
여덟 탑을 친견(親見)하기란 실로 어려운데.
오랜 세월을 겪어 어지러이 타버렸으니
어찌 뵈려는 소원 이루어지겠는가.
하지만 바로 이 아침 내 눈으로 보았노라.


또 하나는 용수보살이 태어나신 남인도 지역에서 쓰신 글입니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그 편에 감히 편지 한 장 부쳐 보지만
바람이 거세어 화답이 안 들리는구나.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일남(日南)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경주)으로 날아가리.


출가한 어린 수행자 혜초스님은 부처님의 숨결을 직접 느끼고 싶어서 1300여 년 전에 그 곳으로 그렇게 떠났던 겁니다.
진실로 번뇌의 불을 끈 불자들은 언제나 평안합니다. 언어적으로 표현하자면 편안은 육체적인 것입니다. 희열도 육체적인 것입니다. 반대로 법열은 정신적인 것입니다. 기쁨이라 하더라도 법열의 기쁨은 정신적 마음작용이고, 희열은 육체적으로 느끼는 기쁨입니다. “편안하셨습니까?”하는 인사는 “몸이 편했냐?”는 말이고 “평안하셨습니까?”하는 인사는 “몸과 마음이 다 편안하셨습니까?”라는 말입니다.


번뇌와 망상이 없으면 어떠한 목마름도 나를 침범치 못합니다. 번뇌는 탐욕과 어리석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고, 그로 인해 화나고 짜증나고 신경질도 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에 맞게 조화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번뇌라고 하는 불을 꺼야하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런 불이 꺼진 사람에게는 더 태울 것이 없습니다. 타던 불이 꺼지면 끊던 물이 잠잠합니다.
치우침, 얽매임, 빠짐의 집착이 사라진 이에게는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번뇌망상의 불만 꺼버리면 고통과 괴로움은 없습니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요,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是罪亦忘)’이라고 했습니다. 죄라는 것이 본래 자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열반경(涅槃經)』에서도 ‘무상지상(無相之相)이 실상(實相)’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모양 없는 모양이 참 모양, 실다운 모양이라는 겁니다.
모양이 있으면 만들어진 겁니다. 만들어진 것은 생주이멸(生住離滅)의 법칙에 의해서 소멸된다는 겁니다. 인연법(因緣法)에 의해서 연기(緣起)되어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이뤄진 것처럼 우리가 안 태어났으면 늙고 병들고 죽을 일이 어디 있습니까? 무명(無明)이라는 무지함이 없으면 생로병사가 어디 있으며 근심과 걱정과 고통과 괴로움 같은 것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고요 속에서, 적적함 속에서 지극히 평온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평화로움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무엇인가에 결사적으로 집착을 합니다. 삶이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 나의 생활이라는 것은 그 무엇 하나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잠자는 시간도, 근심 걱정하는 시간도, 고통 괴로움을 겪는 시간도, 슬프고 아픈 시간도 결국은 내게 주어진 내 인생입니다. 내 삶의 연속입니다.


삶을 배운다는 것은 내려놓기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 무엇을 들고 있을 때 그 손으로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지만, 내려놓으면 안경도 들 수 있고, 가려우면 긁을 수도 있고,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해지려는 욕구의 목마름이 끝이 없습니다. 한이 없고 다함이 없습니다.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퍼서 마시면 한 모금 머금는 것은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계속 짠 바닷물을 마시면 목마름은 가시지 않고 목마름은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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