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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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해야 할 착한일이라면 내가 먼저 하자









   정우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전 주지
   구룡사 회주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현대기계문명이 가까이 와 있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한 마을에 텔레비전은 고사하고 라디오도 한 대 없는 시절이 불과 50년밖에 안 되는데, 이렇게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더불어 살아온 수만 년의 기간 동안의 변화보다 지난 50년 사이의 변화가 결코 작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속도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시간들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이르기를, 『한 부처님이 출현하시면 만 중생이 깨달음을 얻고, 한 법당이 이룩되면 극락세계가 사바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신 모양입니다.


러시아 태생으로 한국에 귀화한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 박노자 교수는 인터뷰에서 “개인적 목적을 불교적으로 보면 번뇌에 덜 시달리고 유쾌한 생활, 이타적인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번뇌(煩惱)라는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탐진치(貪瞋痴)에서 옵니다. 그러한 번뇌에 시달릴 때는 괴롭지만, 그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즐겁다는 말씀입니다.
박노자 교수는 또 “자본주의 사회는 불교적으로 보면 지옥”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달라이라마는 “이론적으로는 자본주의 방식으로 선의의 경쟁을 통해서 돈은 벌고, 이상적으로는 사회주의 방식으로 나눔을 가지면 참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가 달라이라마의 말씀대로만 된다면 여기가 곧 극락세계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박노자 교수가 말한 “자본주의 사회는 불교적으로 보면 지옥”이라는 말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자본주의 사회방식이라는 것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는 중상모략과 시기질투와 권모술수를 써서라도 원하고자 하는 바를 쟁취하면 된다는 방식이기 때문에 불교적 사고로는 지옥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출세를 위해서는 앞만 보고 가야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운전을 할 때도 옆 밀러도 보고, 뒤를 볼 수 있는 앞 밀러도 보면서 가야 사고를 내지 않고 안전한 운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보를 잘 하는 운전수는 추월을 잘 안합니다. 반대로 양보를 안 하는 운전수는 추월을 수시로 합니다. 인과의 법칙으로 보자면, 양보를 안 했으면 추월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납니다. 팥 심어 놓고 콩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과의 법칙인데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네 사는 세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별스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번뇌가 첨예화되고 시달림이 악화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을 살리는 보살도가 기본」이라고 가르칩니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들여다보고 남과 함께 어울림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를 합니다.
그래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술가인 매튜 캘리도 〈위대한 나〉라는 책에서 “누군가의 꿈을 들여다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당신이 과거에 꾸었던 꿈이다. 지금 당신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당신의 꿈은 당신이 꾸었고, 그런 꿈을 꾸어오는 동안 현재의 당신이 만들어졌음을 기억하라.”고 한 모양입니다.
즉,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자작자수(自作自受)며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씀입니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인데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요, 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인데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라”, 전생의 일을 알고 싶으면 지금 처해있는 모습을 보고 다음 생의 내 모습을 보고 싶거든 지금 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군가의 꿈을 들여다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내가 과거에 꾸었던 꿈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꿈은 내 꿈이고, 그런 꿈을 꾸어오는 동안 현재의 내 모습이 만들어졌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의 꿈을 들여다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시력이 약해지면 있는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보조 장치로 안경을 씁니다.
부도수표는 현금이 아닌데도 부도수표를 현금인줄 아는 사람은 이미 사기를 당한 사람입니다.
즉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줄 알 수 있는 안목을 가지고 있으면 안속을 일인데, 부도수표를 보고도 현금인줄 알고 그 사람을 대하면 사기 당하기 십상이라는 말입니다.
왜 도둑을 맞고 강도를 맞습니까? 안가지고 살면 도둑맞을 일이 없습니다. 안가지고 살면 강도 만날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스스로에게 되묻곤 합니다.


“자물쇠가 없으면 감출 물건이 없습니다. 감출게 없으면 잃어버릴게 없습니다. 잃어버릴게 없으면 그렇게 편안하고 넉넉합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녹녹하지만은 않지만, 열쇠가 있다는 것은 감출게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왕 감추려면 잘 감춰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가능하면 비밀을 가지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병을 초기에 발견하면 치료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 병을 초기에 진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병은 시간이 흐르면 진단하고 발견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치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조기진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병은 중증이 되면 척 봐도 압니다. 그때가 되면 치료는 어려워집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보는 사람마다 무슨 병인지 알 정도가 됐다면 이미 늦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면 사태는 악화되고 이윽고 모든 사람들이 알아차릴 때가 되면 어떤 해결책도, 어떤 치료 방법도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식하지 못하면 사태는 악화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차릴 때쯤 되면 어떤 해결책도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마음들을 다잡아서 세상사를 비춰보면 모든 일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모든 문제에는 해답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문제로 삼으면 문제 아닌 문제가 없습니다. 즉, 세상을 보는데 있어서 긍정적인 사고로 바라 볼 것인가, 부정적인 사고로 바라 볼 것인가에 따라서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대비바사론(大毗婆娑論)≫에서 이르기를, 『어두운 방에 비록 갖가지 물건이 있으나 등불이 없어 어둠 속에 숨겨져 있으면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지혜가 있다고 하나 남을 좇아 법을 듣지 않으면 이 사람은 끝내 선악의 의미를 분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상반된 이야기로 하자면, 눈을 감으면 세상에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눈 감았다고 세상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습니다. 언덕은 있는데 소가 없으면 누가 비빌 것입니까?
이처럼 부조화한 현상으로부터 조화로운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고 정진입니다. 그러한 분위기를 우리 불자들이 앞장서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금은보화가 방안에 가득 차 있다고 하더라도 불이 없으면 방안에 금은보화가 있는지 다른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비록 사람이 지혜가 있다 해도 남을 좆아서 다른 이와 더불어 어울림을 가지면서 가르침을 듣지 아니하면, 그런 사람은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 좋은 대로 행동하고 저 좋은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회법으로 보자면 모르고 지은 죄는 용서해 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적으로 접근해보면, 모르고 지은 죄는 소멸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죄인지 죄가 아닌지도 모르고 저질러진 것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괘도 수정이 안 되고 참회가 안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신이 한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것을 점점 줄여나가서 결국에는 그 업을 짓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록되지 않는 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모기가 나를 물고 있는데, 실컷 빨아 먹게 내버려 뒀다가 잡아서 죽이면 악업이 되지만, 잠을 자고 있는데 모기가 물어서 조건반사로 탁 쳐서 죽게 했다면, 나는 알지 못합니다. 또 운전을 하고 있는데 날파리와 같은 곤충이 유리창에 부딪쳐 생을 마감했다거나, 걸으면서 무의식의 상태에서 개미와 같은 생물을 밟아서 생을 마감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악업이기는 하지만, 기록까지 되지는 않습니다. 기록이 안 되면 갚을 일도 없습니다. 그것을 무기업(無起業)이라고 합니다.
최창섭 교수가 지은 〈어처구니가 없네〉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당신이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해라. 착한 일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마음을 주고 손길을 보내고 발길을 내딛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고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그래도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 누군가가 내가 된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이다.”


그래도 해야 된다는 겁니다. 착한 일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저 사람이 무슨 속셈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하면 안 됩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보탬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에서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착한 일이라는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그 행동이라는 것은 마음도 주고 손길도 보내고 발길도 가서 내딛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하고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 누군가가 내가 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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