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라이 라마
티베트 승왕
외부의 적은 오늘은 내게 피해를 입히더라도, 내일은 상황이 바뀌어 내게 큰 도움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적은 계속해서 파괴적입니다. 더구나,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면의 적은 언제나 나와 함께 머물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와 반대로 외부의 적과는 항 상 거리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59년에 티베트인들은 티베트를 탈출했습니다. 그 탈출은 육체적으로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적은 내가 티베트에 있든, 포탈라 궁전에 있든, 다람살라에 있든, 런던에 있든, 어디를 가든 나를 따라옵니다. 내면의 적은 명상할 때조차도 나와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만달라를 관상하는 동안에도, 만달라의 중심부에서 그 내면의 적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우리의 행복을 파괴하는 자는 항상 우리 내면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라는 것이 제 말씀의 요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내면의 적을 쫓아내거나 뿌리 뽑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수행 따위는 아예 잊어버리고 술이나 섹스에 의지해서 살든지 세속적인 사업이나 번창시킬 궁리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적을 뿌리 뽑는 것이 가능 하다면, 우리가 인간의 몸과 두뇌, 선량한 마음을 갖고 태어난 기회를 활용해서 그 힘들을 모아 내면의 적을 약화시키고, 종국에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만이 지성과 논리의 힘으로 마음을 단련하고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두 종류의 감정을 구분합니다. 한 종류는 이성적이지 못하고 선입견에만 입각한 것입니다. 미움은 그런 종류에 속합니다. 이런 종류의 감정은 아주 얄팍한 이성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사람이 나를 무척 속상하게 했어’라는 식의 얄팍한 이성에 근거를 둔 감정입니다. 그러나 곧 그 감정을 뒷받침해 줄 더 깊은 이성을 찾아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올바른 이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감정들을 부정적인 감정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종류의 감정은 이성을 갖춘 감정입니다. 자비심과 이타심이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 감정들을 깊이 분석하면, 그 감정이 좋고, 필요하고, 유용하다는 것이 증명 되기 때문에 이성을 갖춘 감정이라고 합니다. 그 감정들은 본질적으로는 감정의 일종이지만. 실제로는 이성이나 지성과 조화를 이룹니다. 실제로, 지성과 감정이 결합해야만 우리의 내면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내면의 적이 있는 한, 또 우리가 그 적에게 지배되는 한, 영원한 평화는 올 수 없습니다.
이 적을 물리칠 필요성을 아는 것이 진정한 자각이며, 이 적을 물리치기를 열렬히 원하는 것이 해탈에 대한 열망입니다. 불교용어로는‘윤회를 버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감정과 내면세계를 분석하는 수행이 매우 중요합니다.
첫째 단계의 고통인‘고통스러운 고통’을 벗어나려는 욕구는 동물들도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불교경전은 말합니다. 둘째 단계의 고통인‘변화하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은 불교 수행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비(非)불교 수행자들도 삼매(三昧)를 통해서 내면의 고요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하려는 열망은 셋째 단계의 고통, 즉‘윤회에 편재하는 고통’을 인식한 후에만 생깁니다. 즉, 무지가 우리를 지배하는 동안에는 우리가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 들어설 여지가 없음을 깨달은 다음에야 해탈에 대한 열망이 생깁니다. 세 번째 단계인‘윤회에 편재하는 고통’을 깨닫는 것은 불교 수행만이 갖고 있는 독특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