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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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근의 복을 짓는 기축년 한 해 되길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통도사 주지
   구룡사 주지


지난해 몰아닥친 세계경제 한파로 우리들의 가슴도 삼동설한(三冬雪寒)의 날씨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들의 마음이 얼어붙어 있다고 해서 가는 세월이 함께 얼어붙어서 가던 길을 멈추고 서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이 삶을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든 세월은 쉼 없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힘들었던 지난 세월이었지만, 시간은 무자년(戊子年)을 지나 기축년(己丑年) 소띠의 해로 접어든 것입니다.

옛스님의 말씀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했지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자신의 삶과 수행에 대한 새로운 경책으로, 기축년을 맞이하여  우리 삶 속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인생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삶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삶의 터전은 어디이겠습니까? 가정이 그곳이요, 이웃과의 어울림이 그것입니다. 즉 기쁘고 즐거운 것만이 내 인생이고, 슬프고 괴로운 것은 내 인생이 아닌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속에서 일어나는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내 인생인 것입니다.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것도 내 인생이요,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환희법열(歡喜法悅)의 마음을 가지는 것도 내 인생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과 인생, 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재물의 양이 아니라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현재 나는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남편이고, 누구의 어머니이고, 누구의 아버지이고, 또 누구의 아들딸이고, 누구의 며느리이고, 누구의 동생이고, 누구의 언니일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만이 나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형상(形象)은 지금의 모습을 의미하지만, 본질(本質)이라고 하는 본성(本性)은 지금 드러나 있는 그 모습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인생 속에서,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잊혀졌던 나의 본성으로 되돌아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삶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상락아정의 자리를 불교에서는 열반의 자리라고 하고, 니르바나의 자리라고 하고, 부처의 자리라고 하고, 불성의 자리라고 하고, 성품의 자리라고 하고, 본성의 자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라는 것도 결국 무상하다고 말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는 내 육신의 테두리 안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항상(恒常)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법신(法身)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 법신의 자리야 말로 생멸이 없고, 미추(美醜)가 없고, 증감(增減)이 없고, 대소(大小)가 없고, 장단(長短)이 없습니다. 또 이 자리는 이분론법(二分論法)으로 파악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무상한 이 육신은 생로병사가 있어서 언제나 고(苦) 속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 미운사람과 만나는 것, 구하려 하지만 얻어지지 않는 것, 몸이 한결같았으면 하지만 항상 변화되어지는 것이 고입니다.
여기서 고라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을 의미하는 것이고,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으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합니다. 괴로운 것은 번뇌입니다. 번뇌는 탐욕스러움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입니다.

오욕(五慾)은 망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번뇌망상만 끊어도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단번뇌(斷煩惱) 명이승(名二乘)이요, 번뇌불생(煩惱不生) 명대열반(名大涅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도 열반경(涅槃經)에서 ‘단번뇌명해탈(斷煩惱名解脫)이요, 번뇌불생명열반(煩惱不生名涅槃)’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즉, 번뇌망상을 끊으면 해탈했다고 하고, 참 자유를 구했다고 하고,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열반에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무상한 것은 번뇌망상이요, 즐거운 것은 열반입니다. 번뇌망상이 끊긴 자리,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자리를 해탈이라고 하고 열반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 자리는 항상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보면,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색이라는 것이 무엇인데 공과 다르지 않다고 하고, 공이라는 것이 무엇인데 색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색이라는 것은 있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것을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생각으로 번역을 하면 깨끗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색이라는 것은 무상한 것이고 색이라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니, 그 변화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지어 나가고 느껴서 알음알이를 가지는 것 또한 무상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있는 현상이 색이요 있는 그대로가 공입니다.

있는 현상과 있는 그대로는 다르지 않습니다. 있는 현상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인식기관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라는 대상을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으로 작용해서 가름된 것을 이름하여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색(色)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으로 보는 것을 색이라고 했는데 눈으로 안 보이는 것도 색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엑스선, 우주선, 적외선, 감마선입니다. 이것은 우리 눈으로는 감지가 안 되지만 과학적으로는 증명이 된 것들인데, 그것이 바로 공입니다. 이는 마치 지구에서 가장 큰 소리가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인데 우리들은 그 소리와 싸이클이 맞지 않아서 못 듣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은 무상한 것과, 모든 것이 다 괴로운 것과, 내가 없는 것은 다 부정(不淨)한 것입니다. 깨끗하지 않은 것입니다. 항상한 나, 즐거운 나, 참나, 깨끗한 나는 바로 법신과 열반과 부처와 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내면으로부터 향내음을 일으키는 맑고 향기로움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상락아정(常樂我凈)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정
소설가 최인호의 「산중일기」에 보면 얼굴풍경이라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유전적으로 타고 나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도중에 자신의 성격대로 자신의 이미지대로 변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 얼굴의 변천사를 봐도 잘 알 수 있다. 마치 매일 가는 산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면 그 풍경이 바뀌듯 얼굴도 나이에 따라서 그 풍경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얼굴은 그 사람의 역사이며 살아가는 현장이며 그 사람의 풍경인 것이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면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요, 욕지래생사(欲知來生事)면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라, 전생의 일을 알고자하면 금생에 받는 업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요, 내생의 일을 알고자 하면 현재 내가 짓고 있는 업을 살펴보면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인물이 고와지려면 고운 마음을 가지고 착하고, 따뜻하고, 넉넉하고, 편안하고, 너그럽고, 포근하고, 온화한 불보살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전생의 업으로 양귀비 같은 인물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살아가면서 심보를 잘못 쓰면 금새 망가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합니다. 사람의 성품은 본래 착하다고 했습니다. 선근(善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혜(智慧)를 드러내서 살면 그러한 삶이 바로 보살도(菩薩道)요 보살행(菩薩行)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바라밀다(波羅密多)의 삶입니다. 불자의 모습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 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복을 짓는 삶입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관계 속에서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듯이 복은 빌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을 통해서 복이 생기는 것입니다. 거기에 지혜를 합하면 공덕(功德)이 되는 것입니다. 또 복이 있는 사람은 상대가 스스로 그를 위해 움직여 줍니다. 그러나 복이 없는 사람은 장애가 많습니다. 그래서 복 있는 것만큼 장애가 사라지고 복 없는 것만큼 장애가 많은 것은 어쩌면 필연입니다. 살아가는 도중에 자신의 성격대로, 이미지대로 변해가는 것이 내 얼굴의 변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인들은 70, 80의 나이를 먹어도 곱습니다. 그러나 순탄치 못한 삶을 살게 되면 얼굴에 주름살로 고스란히 남게 됩니다. 마치 매일 가는 산이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산의 풍경이 다르듯이 얼굴도 나이에 따라서 그 풍경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역사이며 살아가는 현장이며 그 사람의 풍경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화가 일어나지 않고 화를 내지 않는 다는 것은 욕심이 적다는 것이고, 어리석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화를 잘 내고, 신경질을 잘 부리고,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은 탐진치 삼독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랑은 인간의 내부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드러내는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마음속에 불성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그 불성이 무명업식(無明業識)에 의해 가려져있을 뿐입니다. 그 가려진 무명업식을 걷어내는 것이 바로 수행이고 정진입니다. 그리고 무명업식을 걷어내는 수행정진이 결코 어려운데 있지 않습니다. 불자의 길을 걸으면서 따뜻하고, 넉넉하고, 편안하고, 너그럽고, 포근하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모두를 감싸는 관심과 배려 속에 서로간의 어울림을 갖는 생활을 한다면 불필요한 부분들은 한 꺼풀씩 벗겨져서 본래 내 모습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모두가 힘들다고 하는 이 시기에 바라밀다의 삶을 통해 선근의 복을 짓는 기축년 한 해를 열어가도록 하였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