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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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의 법통설

신규탁
연세대 철학과 교수/한국선학회 회장


1.
스승과 제자 간의 긴밀한 관계는 인류의 역사 속에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선불교에서처럼 강조되는 ‘법통法統’은 중국이라는 특수한 문화에서 생성된 것으로, 인도에서는 볼 수 없는 역사관이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종법제도宗法制度가 시행되어 조상의 소목昭穆을 정리하는 전통이 상고시대부터 있었다. 이런 사회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선불교 특유의 법통의식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땅에 선불교의 전래는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선종이라는 형태의 교단은 당 나라 시대에 그 기초가 마련되어 송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퍼지게 되었다.
그 중에서 서천西天 28조설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현존 최고最古 문헌은 801년 지거智炬가 지은 『조계보림전曹溪寶林傳』이다. 그 후 소위 『육조단경』을 거치면서 동토의 6대 조사 계보가 정립되고, 다시 899년에 편찬된 『성주집聖.集』이 이를 계승하여 확장 보완된다. 그 후에도 각 문파별로 전등서傳燈書가 편찬되는데, 천주 초경사에서 편집된 『조당집』(952년)과
『경덕전등록』(1004년)이 대표적이다. 송나라 시대에 들어서는 1252년에 『오등회원』이 간행되면서 이전의 전등서를 종합하고, 급기야 청나라 말기에는 『오등전서』(100권)가 편찬되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출판 과정 속에서, 고려 시대에 중국의 각종 전등서가 이 땅에 들어온다. 비록 신라 시대에 9산 선문禪門이 있었다고 하지만, 스승과 제자의 구체적 전승을 기록한 전등서로서 당시에 만들어진 것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이런 상화에서 우리나라 선종은 고려 후기 원나라 불교계와의 교류 속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2.
조선 시대에는 종법제가 민간에까지 널리 퍼지면서 소위 반가에서는 족보를 출판하기 시작하는데, 이런 풍조 속에서 만들어진 승가의 족보가 바로 사암 채영獅巖采永 선사가 조선 영조 40년(1764년)에 만든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이다. 이 책에서 그는 서역-중화-해동에 이르는 역대 선사들의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서역과 중화는 차치하고 해동의 경우, 그 중에서도 고려 말의 선종의 계보를 볼 것 같으면, 임제종 중에서도 양기 방회(楊岐方會 992-1049) 이하,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25) 이하, 급암 종신(及菴宗信 생몰연대 미상)의 문하에 평산 처림(平山處林 1279-1361)과 석옥 청공(石屋淸珙 1272-1352)이라는 두 제자가 있는데, 그 중 평산 처림은 고려의 나옹 혜근(1320-1376)을 제자로 두고, 석옥 청공은 고려의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를 제자로 둔다.
그런데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에 의하면 태고 보우를 해동 조계종의 기세조起世祖로 삼고, 그 이하를 태고 1세, 태고 2세 등등으로 표기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법통’에 관한 계보는 어느 시기에 형성되는가? 태고 보우 선사를 해동 임제종의 종조로 받드는 의식은 편양 언기(鞭洋彦機 1581-1644)에게서 구체화 된다.
그 후 청허당의 증법손이 되는 월저 도안(月渚道安 1638-1715) 선사가 지은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1688년)에도 이런 법통 의식이 이어지고, 다시 월저 선사의 5세손인 사암 채영 선사가 지은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1764년)에도 이런 법통 의식은 이어진다.
그 후 세월이 다시 200여 년이 흘러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던 예천 용문사의 안진호 강백은 『서역중화해동불조원류』가 출간된 이후에 출가한 승려들의 행적을 제방으로 조사하여 출판하려 했으나, 결국은 유고가 되었다. 이 유고를 통도사의 경운 형준耕雲炯埈 스님이 『증보불조원류增補佛祖源流』(전4책 원문 영인본1책/증보본 2책/색인1책, 서울: 불교보급사, 초판 1978년 재판 1983년)라고 이름 지어 세상에 내놓는다.
태고 보우 선사를 임제 선사의 18세 법손인 석옥 청공 선사에 연결하여 계대를 명기한 것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물론 태고 보우 선사 자신이 스스로 임제의 선법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사자 전승의 사실은 『태고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은, 태고 보우 선사는 그의 나이 47세(1347년)가 되던 해 7월 당시 원나라의 조주 땅에 있는 하무산 천호암天湖庵에서 석옥 청공을 만나 서로의 선지禪旨를 확인하기 이전에도, 그는 이미 남종선에 대한 이해와 수행의 경지가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정황은 당시 원나라에 유학한 백운 경한 선사나 나옹 혜근 선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석옥 청공과 태고 보우와의 만남은 고려와 원나라라는 서로 다른 지역에 있으면서도 ‘남종선’에서 그 중에서도 ‘임제 계통의 선’이라는 맥락에서 서로가 지향하는 바가 같았었음을 확인하는 그런 만남이었다. 물론 태고 보우 선사에게 있어서는 그 만남을 통하여 ‘임제 계통의 선’의 계보 위에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또 한편으로 자신의 선 수행이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뒷날 태고의 문손임을 자임하는 이들의 경우도 역시 소위 ‘법통’이라는 계보의식을 통하여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수행의 좌표를 삼으려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그것을 문제 삼는 당사자들의 철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법통의 계보’에 관한 문제도 역시 그렇다. 1962년에 대한민국 정부 당국에 등록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자신들의 ‘법통의 계보’를 중국 ‘남종선’의 계보에 맥을 대고 있다. 물론 ‘남종선’의 계보 중에서도 임제계통에 계보를 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태고 중흥조설’과 ‘보조 중흥조설’을 봉합해놓고서는, 창종創宗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그 봉합을 “종단 분열상황을 화합의 차원에서 마무리하였다.”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봉합’한 것이지, 거기에는 철학적 내지는 종교적 그리고 역사적인 근거를 찾아보기 어렵다.
설상가상으로 그들 스스로도 말하듯이 “대한불교조계종은 선종 중심의 선 수행 가풍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한국불교 전반을 아우르는 선교통합禪敎統合의 회통불교적 전통에서 그 특색을 맞추었던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선禪과 교敎를 봉합시켜 교단의 정체성은 더욱 엉키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교단의 일부에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임제의 선사상 내지는 간화선에서 정립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 시대 ‘화엄교학’의 계보 문제도 정리되어야 할 것이고, 또 ‘남종선’의 계보와 사상을 분석 정리하는 작업도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계보의 측면에서 보면 현 대한불교조계종(한국불교태고종 포함)은 태고 보우 선사가 기세조起世祖이고, 환암 혼수부터가 태고 1세가 된다는 점이다. 태고 법통설이 비록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역사 의식이 반영되었고, 그 후손들은 그런 선조들의 역사의식을 계승하여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을 맞이하는 그 때까지 유지해왔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화엄교학을 겸수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태고 이전에는 이 땅에 선불교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신라 하대에 선불교가 당나라로부터 유입되었지만, 법통의 계보를 확증할 문헌적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보조 지눌 선사가 한국선종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의 한 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누구이고, 또 그 제자들의 제자가 누구인지를 문헌적으로 확증할 방법은 없다.
현재에 전통이 살아있는 문중에서 제자들이 성장해서 입실 건당을 할 때에 ‘사실師室’을 차리고 역대 스승들의 ‘위목位穆’을 종이에 써서 번을 걸고 인사를 올린다. 이때에도 태고 보우 선사를 시작으로 해서 지금의 스승까지 이름을 올린다. ‘조파祖派’도 역시 그렇다. 이런 것을 모르거나 승려, 이런 전통이 없는 문중은 끊어진 전통을 이어 조상을 찾아야 할 것이다.


ananda@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