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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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 재정비’필요하다
이학종
미디어붓다 대표기자

계율(戒律)은 녹록지 않은 대상, 지계(持戒)는 버거운 수칙, 파계(破戒)는 께름칙한 부담. 계율과 지계, 파계에 대한 다수 불자들의 느낌은 아마 이렇지 않을까.

계율과 그 계율을 지키는 것, 또 계율을 깨뜨려버리는 것은 붓다 이래 이어져 내려온 불가(佛家)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테마였다. 무시하거나 내버릴 수도, 그렇다고 전가의 보도처럼 일점일획 흔들림 없이 끌어안고 갈 수도 없었던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붓다 재세 시에도 계율의 적용을 놓고 교단이 크게 흔들리는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 한번은 코삼비에서 파계를 한 한 비구의 징계 수위를 놓고 승단이 둘로 나뉘어 크게 다툰 일이고, 나머지는 붓다가 교단을 이끄는데 있어서 계율을 엄격히 적용하지 않고 지나치게 유연하다는 이유로 반기를 든 불교원리주의자 데바닷다의 반역 사건이다.

코삼비에서의 비구들의 다툼은 붓다의 간곡한 만류에도 해결이 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붓다가 코삼비를 떠나면서 충격과 승단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된 재가불자들이 공양거부 등의 적극적 개입을 함으로써 가까스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데바닷다의 반역 사건은 그를 따르는 비구의 수가 5백여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으로 보더라도 심각한 사건이었다. 다행히 붓다의 두 상수제자였던 목갈라 야나와 사리푸트라의 활약으로 극복되었지만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붓다가 생존했던 시절에조차 계율과 관련되어 이처럼 엄청난 소동이 있었으니, 굳이 말법시대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계율의 문제가 다시 회자되는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계율을 대하는, 그 당시의 승단과 불자들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붓다 재세 시에도 엄연히 존재 붓다 계율정신 훼손치 않는 범위 안에서 모든 불자 파계자 만드는 현실 개선해야 했던 계율에 대한 견해차가 불멸후 2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러쿵저러쿵 말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큰 문제일수는 없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그런 논란과 갈등을 극복하고자 하는 교단의 성숙하고도 진지한 계율에 대한 태도이다.

우리나라에서 계율이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신라시대였다. 자장율사로 대표되는 신라불교의 계율중시 풍토는 자연스럽게 신라불교에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기초가 되었다.
몇 해 전 입적한 한국불교 조계종의 대표적 율사 이며 전계대화상이셨던 일타 스님도 계율이 활발히 연구되고 중시되었던 덕택에 신라불교가 융성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계율이 존중되고 잘 지켜지는 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하게 발전했고, 계율을 경시하고 파계행위가 난무할 때는 불교가 쇠약해졌다는 것이다.

부의 축적과 타락으로 계율의식이 흐려지고 파계행위가 난무했던 고려불교가 조선 5백년 억불의 화근을 불렀다는 분석에 이의를 달기는 어렵다. 중국의 이념적 분열과 문화혁명 과정에서 철저히 파괴됐던 중국불교가 그나마 대만에서 부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만불교를 이끈 승려와 재가자들의 확고한 지계의식이 있었다는 점 또한 눈여겨볼 대목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붓다는 계율을 제정하면서, 당신이 정한 계율이라고 하더라도 환경과 기후 등 조건이 다른 곳에서는 그 근본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융통성 있게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계율이 불교교설의 근본 틀인 삼학의 첫째 덕목이자, 경율론 삼장의 핵심 이라는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할 경우 제한적 변용을 인정하는 붓다교설의 독특한 합리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늘 그 융통성의 범위를 과대 해석하거나 나아가 계율정신의 근본마저 뒤흔들며 적용하려는 시도들이었다. 계율의 융통성 있는 적용에 관한 논란은 사실 붓다 입멸 직후에도 나타났다. 이른바 제2결집이 행해 졌던 바이살리에서 5백의 비구들이 붓다의 계율에 대한 논란을 제법 격하게 벌였던 것이다.

당시 비구들 사이에서는 붓다의 계율 중 몇 가지는 기계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융통성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를 둘러싼 견해 차는 역설적이게도 훗날 대승불교의 씨앗을 태동 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불교도들은 이 계율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고, 또 이 시대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 비구 250계와 비구니 348계가 현실적으로 지킬 수 있는 계율들 인가에 대한 회의에 기초한 계율 재정비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붓다 당시에 정해진 계율 중에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내용이 있다면 그 것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존치할 것인가.

필자는 적어도 계율에 관한한 21세기적 재결집이 필요하다고 본다. 도무지 지킬 수 없는 계율을 받아 지니긴 지녔지만, 본의 아니게 파계자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붓다의 계율정신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손질을 하는 순리일 것이다. 중국 선종의 지도자들이 율장 이외에 청규를 만들어 선원운용의 규칙으로 삼았던 것을 좋은 본보기로 삼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중국선종의 선지식들은 율장을 훼손하지 않고 대신에 중국적 환경에 맞는 규칙을 만들어 시행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율장을 무시하거나 방치 했던 것은 아니다.
궁극의 진리를 꿰뚫어 부처의 경계에 오르는 출가사문의 길에 어긋나지 않도록 중국에 맞는 청규를 새로이 정했을 뿐이다. 예컨대, 사원이 도시 주변부에 위치한 인도와는 달리 심심산중에 위치한 사원에서 걸식을 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수행하는 농선(農禪)을 도입한 것은 중국선사들 특유의 무애자재한 성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일일부작 일일불식’을 주창했던 백장 선사를 파계승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교단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출가자의 결혼이나, 보편적 사회통념에도 어긋나는 공공연한 파계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함을 보이되, 육식이나 오신채를 피하라는 것과 같이 산중의 절이 아닌 곳에서는 현실적으로 지키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는 보다 융통성 있는 계율의 적용이 요구되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출가자나 재가자를 파계자로 만들고, 또 늘 파계를 하고 있다는 죄의식에 젖어 살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교단을 형성하는 사부대중의 절대 다수가 현실적으로 어차피 지킬 수 없는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된 계율에 대해서는 융통성을 주는 조처를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만, 융통성 있는 계율적용에 앞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대전제는 붓다의 계율제정 정신의 대대적 선양과 함께, 율사가 많았던 시대에 불교가 융성했다는 불교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청정교단건설에 더욱 진력한다는 사부대중의 공감대 형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