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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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무늬

최홍식_수필가

작은 것 하나도 순수하고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음은 그 사람이 갖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아무라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오래 전에 잠시 나와 가까이 지냈던 그는 정말 순수했고 또 아름다웠다. 젊은 날의 어느 여름에 만들어진 특별한 그와의 사연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를 만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바로 4.19혁명이 일어난 그 해 여름이었다. 우리는 경북 어느 벽촌에서 대학생 하계봉사켐프에 참가하고 있었다. 20여명의 대원들이 작은 초등학교 시설을 빌려 생활을 함께 하며 거의 한 달간 봉사활동을 하였다. 우리가 하는 일은 비교적 단순했다. 오전에는 강의를 듣거나 토론을 했다. 오후의 긴 시간에는 가까운 곳에서 진행 중인 고아원 신축 작업에 참가하고 있었다. 주로 흙벽돌을 만든 다음 말려서 전문가와 함께 새집이 될 벽을 쌓았다. 집짓는 일 외에 마을의 농사일을 돕기도 했다.

그 곳에서 활동한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내가 다니는 학교의 대학신문이 나에게 배달되었다. 친구가 보낸 그 신문에는 내 글이 대학의 문학작품 공모에 입선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이 소식은 켐프 내 동료들 간에 금방 알려졌다. 아마도 그 일이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별로 말이 없던 그가 나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우리는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시(詩)를 좋아한다고 했다.

작업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호수가 있었다. 큰 저수지 같이 보였으나 우리는 호수라고 불렀다. 오후 작업이 일차로 끝나고 쉬는 시간이면 대원들은 땀을 씻은 다음 나무밑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휴식시간을 호숫가에서 혼자 쉬고 돌아 왔다. 어느 날 나는 그의 곁에 앉아 조용히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호수의 수면(水面)만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물결의 속삭임에 스스로 취해서 마치 꿈꾸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면에는 바람에 의해 작은 파문(波紋)만이 일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의하면 물속에도 수면에도 서로 다른 독특한 물의 무늬가 있다는 것이었다. 무늬는 늘 같은 모양이 아니며 주변 환경과 어울려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것들이 만들어지고 그들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런 까닭일까. 그는 이상할 정도로 거의 같은 시간에 한 장소에서 수면을 관찰하고 또 감상하곤 했다. 맑게 갠 날이면 물속에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푸른 나무숲이 모두 잠겨 있었다. 그런 날 오후 세시쯤 이면 배색과 구도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물의 무늬를 감상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과연 물에도 무늬가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파문이 있고 또 물속에는 사물의 그림자가 있음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한동안 여러 가지 무늬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그가 말하는 물의 무늬만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물에 무슨 무늬가 있는가. 그렇다고 이를 두고 그와 논쟁을 할 수도 없는 일 이었다. 어쩌면 그는 수면에 새겨진 바람의 흔적을 찾고 있거나 아니면 자기의 무료함을 달래 줄 물속의 생물과 무생물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나는 혼자 그렇게 상상할 뿐이었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사물이 갖는 각가지 무늬에 대하여 그가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그가 말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물의 순수함과 그것이 내는 아름다운 무늬를 하나씩 관찰하기 시작했지요. 아름다운 것들에는 반드시 무늬가 있습니다. 그래서 무늬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같이 있는 것들 모두를 아름답게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이 사람이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호숫가에 앉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에게 적잖은 관심을 표명했던 그는 이런 일 저런 일들에 대한 내 의견을 묻곤 했다. 때로는 여자 친구와 세상에 관한 얘기도 하였다. 그의 여자 친구는 나비의 무늬를 좋아하고 있지만 자기는 어느 하나에 꼭 집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더운 여름 한 달 동안 계속되었던 우리의 봉사활동이 모두 끝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로 나는 대구의 내 집으로 돌아 왔다.
그와의 이런 사연은 어쩌면 평범한 일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4.19 혁명과 여름이라면 그가 생각나고 내 기억의 샘에서는 우리가 함께 땀 흘렸던 봉사활동과 호수와 물무늬가 차례로 샘물처럼 솟아나왔다. 또한 그가 남긴 ‘무늬는 모두를 아름답게 한다’는 말이 내귀에 무슨 생채기처럼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연뿐이지 오래도록 그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에 나는 김수우 시인이 쓴 <무늬가 있는 그대에게>라는 짧은 산문을 읽었다.
산길을 가다가 함부로 쌓아 둔 장작더미 속에 단청무늬의 서까래를 보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조그만 암자의 지붕으로 있다가 마침내 헐려 장작이 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시인은 그것이 왠지 아름답고 서럽게 보였 다고 했다.
계속해서“… 그 단청 문양은 우리 속에 있을 법한 마음의 무늬를 떠올립니다. 연화 무늬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글로 이어졌다. 나는 이 글을 읽자 금방‘무늬는 모두를 아름답게 한다’는 오래 전 그의 말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마음속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때 그는 과연 물의 무늬만 관찰했을까.
어쩌면 나와 함께 지나면서 나에게도 마음의 무늬가 있는지 그리고 무늬의 색깔과 문양은 어떤 것인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작은 것 하나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그였다. 아름다운 마음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나를 향해 당신의 무늬는 무엇인가라고 속으로 계속 질문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