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05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아람어린이집
    영등포장애인복지관
    다람살라소식
    영어로 배우는 법구경
    금강계단
    알아봅시다
    불서
    불교설화
    절문밖 풍경소리
    즐거움을 뿌려라
    반야샘터
    건강한 생활

과월호보기

흔적에 대하여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은 70년대 미국 여행기 <찰리와 함께 한 여행>에서 영어의 ‘take a trip’이라는 표현이 엉터리라며 은근히 투정을 부립니다. 여행이란 생명을 지닌 존재 같아서 어떤 여행이든 나름의 개성이 있고 우연성이 개입되기 마련이어서 여행자가 오히려 여행의 이끎에 따라가야 한다는, 요컨대 ‘trip takes a man’이라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냥 말장난이라 여길 분들도 계시겠지만, 여행을 오래 다녀본 이들이라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여줄 만한 지적입니다. 진짜 여행은 계획의 바깥에 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글도 그렇습니다. 작가들 중에는 자신의 작품을 자기가 쓴 게 아니라 저절로 써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 작가가 작중 등장인물들로 변해 그들이 스스로 말하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상황을 일컫는 거죠. 그 경우 작가가 집필을 시작할 때 염두에 뒀던 기승전결의 얼개와 메시지는 완전히 해체되고 구상했던 것과는 아주 딴판인 낯선 작품 한 편이 완성돼 있는 겁니다.
여행이나 글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도 대체로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세상 무엇 하나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있던가요. 의도한 것과 다르고 기대한 바에도 어긋난 결말 앞에서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하고 또 때로는 뜻밖의 성과에 의기양양하기도 하면서 다시 새로운 꿈과 계획을 세우신 경험 없으신가요.


봄은 새 생명들이 바람을 타고 제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계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고 몸 속 세포들도 저마다 기지개를 켜며 탈주를 충동질합니다. 톱니바퀴를 벗어나 바람처럼 떠돌고 싶다는 갈망, 중력의 힘을 비웃으며 구름처럼 떠다니고 싶다는 충동이 열꽃처럼 피어 들뜹니다. 하지만 물끄러미 들여다보면 시계 바늘처럼 정교한 톱니바퀴에 떠밀려가는 듯한 일상, 말뚝에 묶인 염소처럼 목줄 반경만큼의 물리적 공간에 갇혀있는 듯한 삶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숱한 굴곡의 드라마와 무한한 양상의 파노라마를 경험합니다. 과연 우리의 삶의 행로란 존 스타인벡의 여행과 같아서 몇 십 년씩 먹먹한 우주를 돌아 오차 없이 제 때 지구 상공을 지나는 혜성의 궤적과는 같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얽어 맨 연기(緣起)의 사슬이란 어마어마하게 광범위하니까요.
우연과도 같은 심연의 연기 위에서 우리가 정말 눈여겨봐야 할 것은 어쩌면 흔적(痕跡)입니다. 흔적이란 사전이 설명하듯 ‘어떤 현상이나 실체가 없어졌거나 지나간 뒤에 남은 자국이나 자취’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지난 세대의 흔적 위에서 태어나 흔적을 남기고 떠납니다. 살면서 추구하는 모든 가치-부나 명예나 학식이나 할 것 없이- 역시 끝내는 흔적입니다. 흔적은 이야기의 형식으로도 남고, 기념비나 부도의 형태로도 남고, 활자나 기억 속에 남기도 합니다.


사소하지만 특별한 개인의 흔적
수년 전 여름휴가를 얻어 서해안의 한 절에서 며칠 묵다 온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간 때가 마침 신도들이 묵어갈 수 있는 건물을 증축한 직후여서 경내는 조금 어수선했고, 무위의 휴식을 기대하고 갔던 저는 조금 실망했던 듯도 합니다. 처사 한 분이 방충망 꾸러미를 들고 제 방에 오셨고, 어쩔 수 없이 거들기 시작한 방충망 설치작업이 10개도 넘는 신도방과 요사채로까지 이어졌고, 꼬박 이틀 쉼 없이 노동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덕분에 공양간 보살님 눈에 들어 공양은 실하게 했고, 과일 등 군입거리도 제법 얻어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기억 역시 내면의 흔적입니다. 그 절 집 창틀 어디쯤에 제 손때와 땀냄새가 스며있을 것 같아 제게 그 절집은 지금도 특별합니다.


지층이 되는 시대의 흔적
약 8년 전 한 건설업체가 서울 종로구 청진동 ‘피맛골’ 일대를 재개발하느라 지반공사를 벌이던 도중 지표면 약 80㎝아래에서 조선 후기 건물지와 백자, 기와편 등을 발굴했습니다. 당시 조사단은 건물 기초석과 기둥석 및 모래와 점토를 섞어 다짐한 지층이 비교적 넓은 범위에서 확인됨으로써 그 일대에 모종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조선후기라면 17~19세기입니다. 지금부터 가장 먼 시기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우리는 약 400년 전 우리 조상보다 성인 허리 높이만큼 돋워진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두터워진 땅의 부피는 아마도 400년 시간 속 숱한 삶들, 그 흔적의 부피일 것입니다.


문명의 흔적과 미래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2010년 개장한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라는 건물인데, 높이가 무려 162층, 828m 라고 합니다. 500m가 넘는 초고층빌딩만도 이 행성 위에는 수십 개가 서 있습니다. 이 말은 거꾸로 지구의 어느 부분은 빌딩 골재의 부피만큼 낮아졌다는 의미로 치환할 수 있겠습니다. 어른 몸통만한 바윗돌을 캐내 9m 높이의 만리장성을 쌓던 진시황 시절이나 지금이나 질량불변의 법칙이 불변하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돌이든 철근콘크리트든 모든 원재료는 결국 지구에서 캐낸 것일 테니까요. 이는 달리 말해 고층 빌딩 하나가 들어선다는 것은 지구 표면의 어떤 부위의 살이 그만큼 깎여나갔다는 의미입니다. 지구 표면의 고도편차는 인류가 나이에 비례해 커져왔습니다. 이 흔적의 부익부빈익빈은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둥그런 구의 형상이 하염없이 일그러지다가 미래의 어느 한 순간, 자전과 공전의 힘의 균형을 잃어 이 행성 자체가 태양계에서 탈락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는 자라면서 나이테를 만듭니다. 나무가 제 몸 속에 아로새긴 세월의 흔적입니다. 지층은 문명의 나이테 같은 것입니다. 나무의 나이테 안에 어떤 해에 불었던 큰 바람의 무늬와 큰 물의 흔적이 남듯이 문명의 나이테 안에도 그 문명을 지탱했던 개개의 인간들이 일군 이야기의 흔적들이 만들어집니다. 그 이야기는 한 줌 먼지로 금세 잊히기도 하고, 고고학자의 들뜬 연구논문 속 한 사례로 인용되기도 하고, 또 연인과의 뜨거운 포옹으로 육박하는 용암의 불덩이에 맞섰던 ‘폼페이의 연인’- 사실은 폴란드 화가 벡진스키의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거대한 사랑의 신화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 각자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흔적이고, 지금 우리가 욕망하고 행하는 하나하나의 몸짓과 성취들이 또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이 덧없다가도 한없이 소중해지기도 합니다.
봄밤이 짧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