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정체성을 말하다
오경후
동국대 불교학술원 교수
기화는 역성혁명으로 바뀐 세상을 거슬러 살았다. 조선 조정과 신료들이 굶주린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물고 뜯고자 했던 불교탄압의 부당성을 바로잡고자 했다. 조선 건국의 주체세력들은 고려후기부터 왕조의 집권층인 권문세족과 함께 불교계를 시대적 모순과 부패의 온상으로 여겼다. 우선 정도전鄭道傳을 중심으로 한 신료들은 불교가 세상에는 쓸모없는 이단異端으로 규정하고, 사회경제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스님들을 환속시키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의 혁파, 그리고 사찰과 사찰에 소속된 노비를 관할 관청에 나누어 소속시키는 정책을 펼쳐 나갔다.
왕조교체와 불교비판의 핵심인물이었던 정도전은 주자성리학에 기초한 불교비판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였다. 태조 7년(1398) 정도전이 19편으로 찬술한 『불씨잡변佛氏雜辨』은 불교비판론을 완성시킨 결과물이자 동시대 불교비판의 기준이 되었다. 그는 맹자나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던 주자와 자신을 연속선상에 놓을 정도로 성리학의 확립과 불교비판에 철저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를 공부하는 학자들 중에는 그의 불교비판론이 동아시아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것으로 사상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불씨잡변』의 내용은 당나라 한유韓愈가 찬술한 『원도原道』·『불골표佛骨表』 그리고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들이 제기한 불교비판론을 여과 없이 그대로 이용한 결정적 한계 역시 지니고 있다. 이른바 불교에 대한 완전한 이해나 성리학에 대한 독자적인 변용變用의 단계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려 말 조선 초 불교비판론자들이 살고 있었던 시대는 성리학이해에서도 차분하게 그 이치를 따지는 ‘궁리窮理’의 차원을 공부하기 보다는 ‘거경居敬’을 중심으로 한 실천윤리에 집중되어있었다. ‘거경’은 마음이 고요할 때는 정신을 각성시켜 무념무상이 되게 하고, 일상생활에서 그 마음이 움직일 때는 일처리를 올바르게 하는 수행법이다. 왕조교체와 건국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성리학의 이치를 궁리하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동시대의 불교비판에서 불교의 반윤리성을 지적하는데 대부분의 정력을 소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정도전이 지적한 불교의 반 윤리성은 성리학의 우주론宇宙論이나 인식론認識論과 결부되어 있다. 즉 불교가 우주자연현상을 진상眞相이 아닌 가상假像, 환영幻影이라고 부인한 것처럼 군신君臣·부모·부부관계와 같은 인간관계 역시 가합假合이라고 해서 인륜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불교는 윤리를 헐어버리고 풍속을 타락시킴으로써 마침내 인류를 금수禽獸의 세계로 몰아가는 인륜의 해충과 같다고 단정하였다. 이와 같은 불교비판과 탄압은 조선건국 이후 고려의 잔재를 청산하고, 주자성리학의 새로운 정신적 기치아래 삼강오륜과 같은 실천윤리를 보급하는 과정에서 왕조개창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은 심지어 불교는 오랑캐의 도道이며, 불법佛法이 중국에 전래된 이후 왕조의 생명이 단축되었다고 했다. 또한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결부된 화복론禍福論 역시 부정하여 불교의 종교성을 전면 부정하였다. 요컨대 그들의 불교비판과 탄압은 불교가 세상을 망치고 혹세무민하여 태평성대에서 멀어지게끔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에게 불교탄압은 성리학을 근간으로 새로운 왕조에 어울리는 통치이념의 확립과 보급의 명분이자 수단이었다.
한편 기화는 삼각산 승가사의 노스님과 만난 이후 불교를 부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교와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결코 분리되어 있거나 대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仁과 불살생不殺生에 대한 확연한 이해로 천하가 둘이 아님을 알았으며, 상대적이고 대립적인 인식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울러 출가 후에는 8,600자에 불과한 비교적 짧은 글인 『현정론顯正論』을 통해 불교비판의 부당성과 유교와 불교의 일치나 조화에 대한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는 불교비판에 대한 대응론이나 일치, 조화론을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주역周易』과 사서四書의 내용을 구체적인 논증으로 활용했으며, 불교경전의 주석에까지도 인용하였다. 『주역』의 무극無極과 음양오행陰陽五行 등을 불교의 삼신불三身佛과 불보살의 공덕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수인手印과 배치시켜 체體·상相·용用의 논리를 치밀하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주자성리학에서 중시했던 사서四書는 실천윤리에서부터 형이상학적인 우주본체론에 이르기까지 성리학 사상을 전반적으로 포괄하고 있다. 기화는 불교사상에 입각하여 유교이론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자신의 논지를 보충하는데 활용하였다. 성균관 유생시절 입신양명을 위해 수학한 경사자집經史子集이 출가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과 함께 유학자들에 의해 단행된 배불론의 부당성과 유불일치와 조화를 주장하는데 광범위하게 전개된 것이다.
기화는 우선 출가수행자 역시 일국一國의 민民으로서 교화敎化를 통해 군국君國에 충성하며, “덕을 갖추고 도를 행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떨쳐 부모를 빛내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출가가 단순히 자신의 영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불가의 효가 유가에서 중시하는 효와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대효大孝를 실천하고 있음을 밝혔다.
불가佛家는 출가하여 어버이를 저버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승과 제자 간에 은혜와 의로움이 독실하여 어진이나 의사義士보다도 나은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이 마음에 의리가 본래 갖추어져 없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정도전, 「조명상인祖明上人에게 주는 시의 서문 중에서」, 『삼봉집』권3)
인용문은 마음은 본래 의리를 갖추고 있음을 설명하는 글이지만, 스승과 제자지간의 은혜와 의리를 지니고 있는 스님들을 그 사례로 들고 있다. 불교를 조선 땅에서 없애고자 했던 정도전조차도 스님들의 은혜와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기화는 스님들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유학자가 자신을 독실히 하고, 고금古今에 달통하며, 윤리를 밝히고, 천지사이의 이치를 배우는 것을 업으로 한다면, 출가수행자 역시 생사生死를 벗어나기 위해 출가하여 수행한 일이나 중생을 교화시키는 일 역시 스님들의 업業이어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인도를 가리켜 서방이라 말하나 인도에서는 중국을 가리켜 동방이라 하는 것과 같다. … 진실로 부처님을 오랑캐라 하여 그 도를 따르지 않겠다면 순임금은 동쪽 오랑캐에서 났고 문왕은 서쪽 오랑캐에서 났다.
(기화, 『현정론』 중에서)
당시 조선의 유학자들은 불교를 서방에서 전래된 오랑캐의 도(이적지교夷狄之敎)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대해 기화는 유학자들의 중화中華와 이국夷國에 대한 구분을 그릇에 비유하여 “그릇은 그 크기나 모양에 상관없이 각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하여 중화가 천하라면 유학자들이 지적하는 이국夷國도 천하라고 하여 도의 보편성과 상대성을 피력하였다. 결국 도는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형태나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지 않음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고려말 조선초 유학과 불교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사상논쟁에서 기화의 이론과 주장이 돋보인 것은 비판을 위한 비판과 이기기 위한 맹목적인 대응론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유교와 불교의 일치점뿐만 아니라 혼란하고 모순투성이의 세상을 평안하게 할 조화로움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기화의 유불조화론이 암울한 불교계를 구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현실타협적 성격이 강했다고 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부분적으로는 타당성 있는 말이지만, 기화의 생각을 온전하게 살피지 못한 탓이다. 기화는 유교와 불교가 본질이나 성격에서도 상통하며, 그것은 불교의 오계五戒와 유교의 오상五常과 같은 실천윤리에서 더욱 구체화된다고 하였다.
득통 기화는 불교가 탄압받고 소외받는 그 한복판을 살다 갔다. 그가 주장한 불교존립의 정당성이 동시대에는 허무맹랑한 것으로, 후대에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현실타협적인 것으로 비쳐지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