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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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고 가는 길에서 여여함을 만나다

 
-보광사 봉향각 ‘송화차’ 향기에서-


이서연
시인


유월은 푸름의 속도와 농도가 높아진다. 산야가 푸르러 가는 가운데 장미향이 절정에 이르면 숨 한 번 쉴 때마다 그 체취에 저절로 마음이 쏠린다. 이 계절이면 어쩔 수 없이 그 향기에 일렁일 수밖에 없는 게 특별과정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인연’이란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든 그 무엇과 어떤 것에 의함이든 특별하게 여겨진다. 사람과 사람의 특별함은 무얼까. 스쳐 지나는 관계 속에서도 마음에 남는 얘기는 그 사람을 특별하게 여기게 한다. 그러나 비즈니스 관계더라도 그 추억이, 특히 비밀이 서로에게 다르게 기억되는 경우 특별함은 더 이상 특징이 없게 된다. 안타깝게 그 인연은 인연이되 선연善緣이 아니라 악연惡緣의 줄기가 되는 경우가 있다.
사랑이나 우정은 순수함의 순도에 따라 접근방식이 다르지만 일반적으로는 관심이 설렘으로 변하면서 설렘이 주는 매력에서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아, 이건 분명 아름다움이요, 순수감정이다. 하지만 그 전율에 예상치 못한 상처를 입게 되면 아름답게 여기던 인연이 그때부터 특별하지 않은 인연이길 바라게 된다.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식적 방어다.
나처럼 아름다운 감정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인연에 얽혀 마음 앓이하는 문우가 있다. 그 문우의 눈물이 자꾸 밟혀 산사에서 초 하나를 밝혀 주었다. 중생이 앓으니 나도 앓는다는 부처의 마음을 흉내내려는 게 아니라 비록 작가가 마음앓이로 창작의 불을 지피는 존재지만 작가도 사람인지라 가슴앓이로 몸살을 앓는 때는 남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이게 그냥 중생의 삶이니까.


향기를 살라먹은 물빛 같은 꿈을 타고
출렁여 온 마음 앓이 담장 밖을 서성인다
어쩌랴
숨가쁜 목숨
그 번뇌가 화두인 걸
                         -<사랑의 그림자> 1연-
 
자기중심적으로 인간관계를 보거나 맺는 사람들이 봤으면 하는 드라마가 있었다. “미스터 선샤인”. 이 드라마는 보편적 사랑이 아닌 특별한 인간관계의 새로운 시각을 던져 줬다. “누구나 제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플 수 있어. 근데 심장이 뜯겨나가 본 사람 앞에서 아프단 소린 하지 말아야지. 그건 부끄러움의 문제거든.”이란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저마다 자기중심에서 아픔을 보기 때문에 상대방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상대방의 아픔을 안다면 제대로 자신의 부끄러움도 알지만 대개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모르기에 상대 아픔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산사에서는 언제라도 마음을 다 내려놓게 되는 특별함을 만나게 된다. 시절시절 눈뜨고 살아가야 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몹쓸 그리움이 상처를 들쑤시는 날이면 산사를 찾는다. 그리고 나만 살피느라 보듬어보려 하지 않았던 상대 아픔에 관심을 얼마나 두었는가를 돌아보곤 한다.  
이렇게 이번 6월에 품은 화두엔 푸름을 담은 꽃향처럼 고뇌의 꽃이 필 때 일렁이는 번뇌를 품고 있다. 이럴 땐 번뇌를 키우는 사색의 언저리에서 잠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산사를 찾는다. 사춘기 시절 자주 찾았던 산사, 방학 때마다 수일간 머물렀던 산사가 천년고찰 파주 보광사다. 수십 년 세월 속에 조금씩 도량풍경이 바뀌어 낯설 순간도 있지만 여전히 만세루에 걸려 있는 목어와 세월의 풍상 속에서 더욱 옛향의 가치를 느끼게 해 주는 법당 벽화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고령산 천년 도량
보광사 만세루엔  
인연의 안과 밖
그 상처의 뿌리끝서
저 홀로 화두 된 목어
사리쏟듯 염불한다
        -<만세루 목어>-


묵언의 설법을 푸는 목어와 세월 속에 점점 희미해지는 벽화를 안쓰럽게 보면서 도량을 돌면 얼룩진 속허물들이 조금씩 벗어지는 느낌이다. 영조가 생모 최 씨(동이)의 영혼을 모신 전각과 그 옆을 지키고 있는 향나무가 어린 시절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건만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나이탓인가 싶다. 역사적으로 여러 평가를 받는 영조의 가슴에 생모의 존재는 어떤 존재였을까. 저 나무는 임금으로서의 영조가 아니라 한 어머니의 한을 이해하는 아들, 영조로서 그 마음을 말없이 품고 있으리라. 상대의 마음으로 보면 그 마음까지 헤아려지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도량을 다시 돌아나와 수각에서 물 한 잔 마시고 봉향각에 들어갔다.
관음전에는 ‘솔바람’이라는 이름의 찻집이 있었다. 지금은 찻집 이름없이 그 자리에 봉향각이 있고, 깔끔한 테이블들이 바깥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는 차맛을 즐기려는 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직접 담근 오미자와 송화차 중에서 아무런 망설임없이 송화차를 주문했다. 어린 시절 보광사에서 잣을 따서 나누어 주시던 스님이 생각났다. 그 잣나무 향이 어린 시절엔 내가 맡은 산내음이었고, 산사의 내음이었다. 송화차엔 목 뒤로 넘어가는 맛에 산을 닮은 과묵한 향기가 있다.
 
바람이 다진 세월 솔향으로 다시 다져
가슴으로 퍼뜨리면 내 세월도 향기롤까
송화차 한 모금 넘기며 별 궁리를 다해 본다


 인연에 휘말리며 멀어진 인연일지라도 송화 피는 계절에 그 인연이 떠오를 때가 있다면 그건 인연을 추억의 풍경으로 만들어 스스로를 보듬는 기회로 삼으라는 부처님의 시그널일지도 모른다.  
진성여왕이 이 사찰을 짓고 나라를 위해 불공을 올리던 시대에도 솔향은 부처님 도량을 돌았으리 여기며, 복잡한 심경 하나 송화차로 녹여 본다. 이 순간의 여여함, 이것이 바로 요즘 말하는 소확행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