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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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

 김지상
화광전통미술연구소, 중국국가박물관수복연구원

중국불교는 후한(後漢)의 명제(明帝)때인 영명 (永明) 10년(AD 67년) 대월씨국(大月氏國)에서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난(竺法蘭)이 낙양에 와서 <42장경(四十二章經)>을 번역한 것이 최초 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은 BC 2세기말에 전한(前漢)에 의한 서역경영(西域經營)의 결과로써 서역 인들에 의해 서서히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불 교가 전래되던 초기 한민족(漢民族)은 유교를 국 시로 하고, 그 문화전통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 므로 좀처럼 이국의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려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삼국의 동란을 거쳐 서진(西
晉)시대가 되자 노장사상이 귀족사회에 번져 나 갔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불교는 노장사상에 합 치하는 것이라 하여 점점 한민족 사이에 침투하 게 되었다. 때문에 당시의 불교는 노장사상을 매 개로 해서 이해되었으며, 경전의 번역에도 노장 (老莊)의 개념이 사용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뿌리 내리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은 남북조(南北朝)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인물로서 구마라습(鳩摩羅什)과 그의 역경활동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법화경>을 비롯해 많은 대승경전과‘용수’의 <중 론>, <대지도론>등 주요한 논전들을 번역했다.
그의 역경사업에 의해 중국인은 처음으로 불교교 리의 정통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중국의 초기불교는 수(水)·당(唐) 시대로 이어 져서 중국불교의 일대 특색을 이루게 된다. 특히 북위(北魏)는 그 오랜 지배기간(386-534)동안 때로는 불교배척을 명했던 태무제(太武帝) 등이 있었지만, 그밖에는 모두가 불교를 열렬히 신봉 했으며 이로 인해 불교가 크게 발전했다. 운강(雲岡)과 용문의 석굴도 이때의 소산이다.
용문석굴(龍門石窟)은 중국 중부의 하남(河南) 성 낙양(洛陽)시 남부교 외 12.5킬로미터, 용문 협곡 동, 서 두 절벽 사 이에 위치하고 있다. 룽 먼에는 이허(伊河)라는 강이 흐른다. 강을 사이 에 두고 서로 다른 역사 를 지닌 두 개의 석굴이 있다. 서쪽에 있는 석굴 을 서산석굴, 동쪽에 있 는 석굴을 동산석굴이라 한다. 용문석굴과 감숙 (甘肅) 돈황막고굴(敦煌莫高窟) 산서(山西)의 대 동(大同) 운강석굴(云岡石窟)은 중국의 3대의 보
물이라고 말한다.

석굴은 북위 효문제(孝文帝, 기원 471∼477년) 시기부터 파기 시작하여 400 여년에 거쳐 완성되 었고 지금까지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용문석굴의 남북 길이가 대략 1킬로미터이며, 현 존 석굴이 1,300 여개, 동굴 감실이 2,345개, 시 문과 비석조각이 3,600 여점, 불탑이 50여 기, 불상이 97,000여 기가 있다.
용문석굴의 역사는 북위의 효문제가 산서성의 다퉁에서 뤄양으로 천도한 494년(태화 18년)부 터 시작된다. 불교 조각 역사상 운강석굴의 뒤를 이은 룽먼기(494년 - 520년)로 불리는 시기의 시작이다.

운강석굴의 엉성한 사암질과 비교하면, 용문석 굴의 특징은 딱딱하고, 촘촘한 감람석재료로 되 어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북위기에 있어서는, 운강과 같이 거대한 석굴을 깎는다는 것은 기술 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위서 석로지에도, 500년 (경명 2년)에 선무제가 효문제를 위해서 축조한 석굴은 규모가 너무 커서 햇빛이 보이지 않고, 계 획축소를 피할 수 없게 된 내역을 기록하고 있다.
양식상의 특징은 갸름하고 처진 어깨, 목이 긴 조 형이며, 전체적으로 가녀린 인상을 주는 점에 있 다. 또 중국 고유의 조형도 눈에 띄어, 서방풍의 흔적은 희박해진다. 상괘좌가 발달하고, 장식도 섬세하여 회화적인 표현이 두드러졌다.

최초의 제작기는 5세기말 고양동석굴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사적인 불상 축조에서 시작되었다. 전 대인 선무제의 계획을 수용하여 산과 들을 깎아 만든 빈양동 3굴 가운데, 실제로 북위에 완성한 것은 빈양중동뿐이었고, 빈양남동과 북동이 완성 된 것은 당나라 초기였다. 그 외 북위 시기의 대표 적인 석굴로는 연화동을 들 수 있다. 북위 멸망 후 에도 석굴의 축조는 대를 이어 계속되는데 약방동 은 북제로부터 수나라에 걸쳐 축조된 석굴이다.
당나라 때는 위나라의 왕 태가 빈양 3동을 수 복해, 저수량(楮遂良)에게 명을 내려 서도사상으 로 유명한「이궐불감비」를 쓰게 하여 641년(정관 15년)에 비를 세웠다. 당나라 시대의 첫 대표작으 로는 656년 - 669년(현경 연간~총장 연간)에 완 성한 경선사동이 있다. 그 후 혜간동이나 만불동 이 완성되어, 고종 시대에 룽먼석굴은 최대의 전 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절정기의 석굴이 675년(상원 2년)에 완성된 봉선사동이다. 이것은 룽먼 최대의 석굴로 고종 때 시작되어 황후 무씨(후의 측천무후)도 예산을 기부하였다. 그 본존 비로자나불의 얼굴은 당시 이미 실권을 장악 하고 있던 측천무후의 용모를 조각한 것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기부된 시기와 맞지도 않고 여러 근거에서 부정되고 있다.
북쪽의 빈양북동은 북위시기에 공사가 시작됐 고 당나라초기(서기641~650)에 완공됐다.주불 (主佛)은 아미타불이고 화염무늬 광배의 빛이 복 잡하고 생동하다. 남쪽의 빈양남동은 역시 북위 시기에 공사가 시작됐으나, 북동과 함께 궁중의 권력투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수나라 내지 당나라 초기(서기 595~618)에야 완공됐다.
만불동은 빈양동 남쪽에 있으며 용문산 중간에 있는 벼랑에 자리 잡고 있다.서기 680년인 당나 라 고종 영릉원년 11월에 완공된 것으로 당 고종 과 측천무후를 위해 만들어진 동굴이다. 동굴안 의 남과 북쪽 벽에 바둑판같은 네모 안에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크기의 15,000여기 불상이 촘촘히 새겨져 있기 때문에 만불동이라고 불려왔다. 불 교에서는 부처님은 세 가지 모습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을 가 리키며 이를 삼신불(三身佛)이라 한다.그중에 보 신불(報身佛)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수행 한 공덕에 의해 복과 덕이 가득하여 고통 받는 모 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다

용문석굴에서 아쉬운 것은 곳곳에서 많은 불상 들의 목이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우리도 조금 더 문화에 대한 인식을 갖고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 고 계승 시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