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티베트 승왕
달라이라마의 <입보리행론>, 인내의 행복
“달라이라마께서 티베트로 돌아오시기를 서원합니다(공사 촉 붸라 덴데 슈궤).”
중국정부를 향한 티베트인들의 애원에 대한 답이었을까. 홍콩의 티베트한족우호협회(Chinese Tibetan Friendship Association) 리카이샤(李慨俠) 회장은 오는 9월에 달라이라마(뗀진갸초, 78)를 홍콩에 초청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인도 주재 티베트 망명정부의 달라아라마 사무소에서는 이 제안을 일언에 거절했다. 이유는, 과거 이미 중국정부로부터 수차례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을 뿐만 아니라 9월은 이미 달라이라마의 공식 일정이 확정됐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결국 성사되지 못했지만 한국에서도 수차례 달라이라마를 초청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급기야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하다는 특별 자치도 제주도에 초청하기 위한 방안도 진행이 되는 듯 하다가 그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달라이라마가 몽골을 방문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유지로 한국 공항에서 몇 시간여 대기해야 하는 사항조차 거부당하는 실정에서,
그 아무리 자치행정구역인 제주도라고 해도 무인도이거나 경제 교역이 없는 이상 결코 쉽지만은 않은 공사였다 싶다.
때문에 달라이라마의 뜻을 따르는 제자들과 외국 국적을 취득한 망명정부 관계자들이 달라이라마의 메시지를 전하는 특사의 임무를 지금까지 대행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불교계 역시도 중국의 눈치 보기로 미뤄만 오다가 티베트 망명정부 종교문화성 장관(빼마 친조르)과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과의 첫 회동이 비공식적으로 성사된 것도 작년 11월이었다. 작년 6월에 한국을 방문한 전 티베트 망명정부 총리 삼동린포체께서 여수에서 개최된 세계불교도대(WFB)에 참석했을 때도 조계종 국제부는 결국 양자의 회동을 거절했다. 이상의 몇 가지 예를 통해 비춰 보아도 한국불교가 얼마나 민감하게 달라이라마와 티베트 망명정부를 대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시아의 관문인 한국이 ‘북동 아시아의 제네바’로 평화와 공존의 만남이 오가는 나라가 되는 그 날이 도래하기를 기대해 본다.
7월 6일은 14대 달라이라마의 78세 생신이다. 한국에 사무소를 둔 티베트하우스코리아(Tibet House Korea, 소장 뗀진남카)는 일본에서의 6일 기념행사를 연 다음 날인 7일에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장수기도 법회(뗀슉)를 연다. 이 날은 티베트와 티베트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는 사부대중이 참석하여 교류를 확인하는 연중행사다. 달라이라마의 장수를 기원하는 법회에 대해 일각에서는 부정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장수기원이라는 표현을 대신해 ‘제세 권청’으로 바꿔야 한다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스승과 제자의 법 인연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티베트에서는 스승께서 인간 세에 오래 머무시어 법을 더 설해 주시기를 권청하는 전통이 있다. 때문에 달라이라마의 법회 마지막 날은 항시 장수 기도로 마무리를 하는데 이 의례도 장관을 연출한다. 수년 전에 달라이라마께서 본 인의 제세권청 법회에 대해 횟수와 규모를 자제할 것을 당부한 적은 있지만 실제 열리는 것에 관해 거부하신 일은 없다. 칼라차크라와 같은 수십만 명의 불제자들이 참석한 대법회에서나 다람살라 남걀사원에서 열리는 정기 법회에서나 그 규모에 상관없이 권청을 하는 이가 있다면 언제나 기꺼이 받아 주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올해 달라이라마의 생신 축하는 다람살라에서가 아닌 남인도 벨라쿠피 세라사원에서 법문과 함께 진행될 것이라고 망명정부의 측근은 전했다. 무명을 밝히는 지혜의 나침반을 보이시는 선지식께서 오래오래 중생의 곁에 머물러 주시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다음은 달라이라마의 <입보리행론> 가운데 6장. ‘인욕품’)
설일체유부의 설에 따르면 석가모니 붓다의 6년 고행 당시에 이미 자량도를 이루신 후 가행도로서 나아가 깨달음을 증득하셨습니다. 산스크리트어문에서는 3대 아승지겁 동안 쌓은 공덕의 자량으로 무주처열반을 성취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현교와 밀교를 아울러 붓다는 네 가지의 신으로 표현을 합니다만 금강승에서는 붓다의 나툼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도 보드가야에서의 초전법륜과 영축산에서 두 번째 무아의 반야법륜을 굴리시고 마지막 삼전법륜인 여래장경과 <해심밀경>을 설하심에 있어 현재까지 대승불전의 비불설 공방이 오가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삼전법륜을 설하신 바는 대승의 법을 수행하는 보다 상근기를 위한 의도임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중생에게 보다 널리 바탕이 되는 법륜인 사성제는 우리 중생이 직면한 ‘나’의 현안에서 답을 구하는 말씀임을 새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고 항시 말하면서도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들에 항시 애착합니다. 화를 냄에도 원인과 조건에 의한 것임을 안다면 어찌 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요.
한 예로 몽둥이에 맞아서 화가 일어났을 때는 나를 때린 몽둥이에 화를 냄이 옳을까요, 아니면 몽둥이를 휘두른 자에게 화를 내야 할까요? 그러나 몽둥이를 휘두른 자 역시 번뇌에 의함이며 내가 맞음 또한 과거의 인과이니 때리고 또한 맞음은 상호 의존한 작용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연은 서가 맞물린 인과의 고리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원인을 어디서 찾으십니까? 만약 자신이 지옥에 태어나게 되었을 때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면,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는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나의 업에 의해서 결국 나를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인욕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타인의 번뇌를 나의 공덕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전도한 생각으로 길들여 스스로를 인내하도록 하십시오. 만약 나에게 인내의 공덕이 있다면 절대 지옥 고를 겪지 않을 것입니다. 백년을 즐기거나 순간을 즐기거나 종국에는 알몸에 빈손입니다.
일체가 인연입니다. 내가 집착하고 아끼는 무엇에 누가 해를 끼쳤을 때 더욱 화가 나지요.
이유는 나의 것이라는 집착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나는 나를 위해서 바르게 행한 바가 없는데 어찌 타인을 위해서 행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이제부터는 복덕을 키우기 위해 집중해 보세요. 복덕의 보배가 불에 타지 않도록 집착의 근원을 끊어야 합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이가 손목을 자르는 것만으로 죽음을 면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듯이, 단조롭고 평안한 삶으로 모난 번뇌들을 연마하여 지옥의 고통을 면하게 된다면 이 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타인의 행복을 인정해 주세요. 당신이 함께 인정할 때만 느낄 수 있는 나눔의 큰 행복이 있습니다. 자신의 공덕을 스스로 칭찬할 때는 타인이 함께 즐거워 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타인의 공덕을 칭찬하지 않고 오히려 비방하려 하는 것은 어떤 의도입니까. 타인의 행복을 바라면서 시기와 질투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보리심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얻은 것을 지니지 못함에 화를 내던 어제 당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신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입었을 때 얼마나 큰 원망과 비방을 해 왔는지 회자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 내가 나를 위하고 마음이 편안해 지기 위한 방법을 구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쌓아 올린 부귀와 명성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모래성과 같음을 기억하세요. 칭찬에 나를 미혹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염리심을 굳건히 함에 타인의 칭찬을 즐기지도 마세요. 인욕보다 뛰어난 복을 짓는 수행법은 없습니다. 복덕 자량을 쌓는 법으로는 인욕과 인내가 최고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겨나게 하고 비로소 생겨난 결과들인 것이기에 결코 방해란 없습니다.
인욕 수행이란 자신의 스승을 상대로 두는 것이 아닙니다. 불보살을 통해 수행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닙니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이들이 바로 보살이 되고자 하는 나에게 인욕수행으로서 기반을 마련해 주는 스승입니다. 마치 때에 맞춰 나타나는 걸인이 보시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며 출가를 하게 해 주는 것이 승려가 됨의 방해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 주변인이 해가 되지 않는다면 인욕 수행은 불가능합니다. 보리행을 벗으로 삼아 “나는 원수를 사랑하리라”라고 인욕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적이 나를 돕고자 하는 의도가 없고 방해하려는 의도뿐임에도 왜 나는 그들을 공경해야 할까요. 마치 의사와 같이 고통을 구하는 좋은 일만 하려 한다면 어찌 인욕 수행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의 분노심에 의지하여 인내심을 생기게 하니 나의 적으로 마주한 이에게 어찌 공양을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붓다께서는 중생의 복전이 붓다의 복전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헌공하는 것은 중생의 고귀한 성품입니다. 자비는 항시 중생을 그 대상으로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번뇌장과 소지장을 끊어 정각을 이룬 후에도 붓다께서 중생의 부모로 남으신 것은 바로 자비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타인을 존중한다면 공존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여 보세요. 내가 붓다의 제자로서 붓다를 섬김에 있어 붓다께서 가장 위하시는 중생에게 내가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참회하시기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을 내는 이가 된다면 어찌 우리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신 여래께서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겠다’는 그 마음을 키워 나아가며 후에 붓다를 성취하는 공덕의 자량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스승인 달라이라마와 제자의 법 인연을 기반으로 하여, ‘지금부터는 윤회를 일으키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정진하십시오.
인도 다람살라에서 가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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