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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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의 노후복지

최윤필
한국일보 기자


생명이 겪는 보편적인 고통을 불가에서는 ‘4고四苦’로 분류합니다. 태어남과 늙음 병듦 죽음, 즉 생로병사生老病死입니다. 병듦(病)을 늙음(老) 뒤에 배치한 걸 보면, 4고에서 말하는 질병은 홍역이나 볼거리 혹은 배탈처럼 노화와 무관하게 일상적으로 찾아 드는 질병보다는 노쇠한 육신이 감당해야 하는 병을 특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네 개의 고통 가운데 세 개가 노년과 함께 비롯되는 것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그렇게 노년의 시간은,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느리고 무거운 시간인가 봅니다. ‘60 청춘’식의 노년의 활력을 북돋우는 시대적 찬사와 사회적 응원도 저 어쩔 수 없는 경향적 침울에 대한 반작용일지 모르겠습니다.
사회가 노령화하면서 ‘노후 대비’라는 말도 기본적인 생활수칙처럼 회자됩니다. 대비해야 할 노후란 생물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저 3고에 대한 개인적·사회적 대책을 마련하자는 의미입니다. 완벽히 모면하거나 회피할 순 없어도 그 고통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덜 무겁고 덜 어둡게 살기 위한 방책, 그것이 노후 대비일 것입니다. 야박한 말일지 모르지만 그 방책은 결국 돈과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과 마을공동체 중심의 전통사회에서는 노후의 짐이 상대적으로 덜 무거웠을 것입니다. 늙어 경제활동을 중단한 뒤에도 부양하고 시중 들 가족과 이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윤리적 의무나 인간적 도리이기 이전에 대대로 이어져 온 자연스러운 관습이었기 때문에 받드는 이도 받듦을 받는 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이미 끝났거나 끝나가고 있습니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공동체가 붕괴된 것은 오래 전 일이며, 가족·친지간 유대 역시 급격히 느슨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국민연금이 못 미더운 이들은 30,40대서부터 연금저축·보험을 챙기고, 모기지론 등 각종 노후대비 전략을 구상하느라 분주합니다. 사회보험에 대한 정비, 정년 시한 연장에 대한 논의도 비슷한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 노력일 것입니다.
불가의 노후는 배경이나 양상 등 여러 면에서 속가의 노후와 다른 듯합니다. 스님의 신분은 일단 세속의 인연을 부인함으로써 성립합니다. 생물학적 인연을 끊고 뭇 생명·우주와의 보편 인연, 즉 연기緣起의 광막함 안에 스스로를 두어야 합니다. 그 인연은 넓지만 아스라하고, 깊지만 집착이 없습니다. 특별히 앞세워 좇거나 스스로를 묶어세울 만한 도드라진 인연이란 게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수행에는 장점이지만 생물학적 노년의 고통을 감당하는 데는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집착 없는 수행의 이론적 배경이자 실천적 결과로서의 ‘무소유’도 그러합니다. 늙고 병들어 돌봐줄 이도, 치료받을 돈도, 마음 편히 육신 누일 거처도 마땅치 않은 노스님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불교정신의 정수, 그리고 출가수도자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 그 문제의 부담이 점점 커져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역시 시대적·사회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굴레에 갇힌 모든 생명에게 노후문제는 우선 실존의 문제입니다. 불가라고 다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노스님에게 수발 들어줄 시봉이 있을 수 없고, 기라성 같은 상좌스님들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연 깊은 사찰이나 문중·교구에 노년을 의탁하거나 수행공동체 구성원의 성의에 기대고는 있다지만 그 역시 개별적으로 큰 편차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따로 축재蓄財도 하고, 세력도 형성하고, 극히 드문 경우겠으나 은밀하고 특별한 속세와의 인연을 맺는 경우가 있다는 말도 들립니다. 조계종 종단쇄신위원회가 최근 ‘승가 청규(淸規, 청정한 규칙)’라는 걸 만들어 그 안에 승랍별 자가용차 배기량 한도까지 규정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써 필요한 일일지 모르지만 승려 노후보장이라는 더 심대한 문제에 대한 해법 없는 청규는 공허한 위선으로 그칠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노후문제는 실존적 차원을 넘어 한국불교의 미래가 걸린 과제이기도 합니다. 종단과 불교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토대이자 재생산 기반이라는 의미입니다. 수행자로서 모범적 삶을 살다 가는 분들의 노년에 물질적 부담까지 감당토록 하는 현 시스템은 공동체 존립의 근거를 이념적·현실적으로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11년부터 교구 차원에서 승려노후수행마을을 운영하고 있는 전북 고창의 선운사 주지 법만스님은 한 인터뷰에서 “승려 고령화에서 오는 부담은 불교 발전 동력의 상실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이 이 사안에 대해 그간 뒷짐만 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2010년 승려복지법을 제정해 의료비·요양비 지원, 국민건강보험·국민연금 가입 의무화, 수행연금 지급 등 장치를 마련한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미흡하다는 지적은 법 제정 당시부터 제기됐습니다. 승려복지제도에 따른 노후 예상 수령액(2011년 기준)은 10년 납입 시 월 12만 7,620원, 20년 납입 시 24만 2,140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국민연금 평균 수령액을 합쳐도 월 50만원 내외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수행연금 제도에 대한 홍보가 미흡해서 스님 10명 중 6명이 아예 그 제도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조사 결과도 발표된 바 있습니다.
총무원 승려복지회가 최근 전국 65세 이상 스님 1,83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개인적으로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응답자는 34.1%에 불과했습니다. 노후 걱정은 질병치료(43.8%)- 생활수발(17.7%)- 생활비(16.9%)- 거처안정(6.7%) 등 순이었습니다. 거처의 경우 응답자 절반만이 생활할 거처를 마련 중이라고 했는데, 소속 사찰의 별채는 21%에 그쳤고 나머지는 사설사암(19.6%)이나 요양원 등 공동주거시설(15.3%)이었습니다. 10명 가운데 7명이 “승려 노후생활이 보장되지 않아 사설사암 소유 등 공동체정신이 무너지고 있다”고 응답했습니다.
다수의 스님들은 노후에 도반이나 상좌와 함께 생활하기를 원했고(71.1%), 노후 수발을 중앙 종단과 거주사찰, 상좌, 교구본사 등 구성원 공동이 책임져야 한다는 데 다수(76.6%)가 동의했습니다.
노후대책, 노령화 사회 대책은 국가와 사회 차원에서도 부실하고 미흡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각종 정책시안들을 놓고 논의를 거듭하고 있지만 막대한 비용이 드는 문제라 선뜻 길을 찾지 못하는 형국입니다. 불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법만스님은 “사찰이나 암자 차원에서 개별적 보호와 요양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므로 전문적인 보호·요양이 불가능한 형편”이라고 말했습니다. 비용 문제뿐 아니라 사찰·교구별 재정 투명성 문제, 분담금 조정 문제까지 얽혀있어 갈 길이 멀지만, 서둘러 가야 할 길인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법적·제도적 방편 마련과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떠한 제도도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일 것입니다. 법과 제도가 방비하지 못하는 허점, 종단과 교구본사가 채워주지 못하는 공백을 메우는 것은 승가공동체 구성원들의 비공식적·개별적 협력, 재가불자를 비롯한 사부대중들의 공감과 헌신일 것입니다.
예컨대 법조인들이 만든 ‘공익법률기금’ 같은 것도 제도적 공백을 메우는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법연수원의 41기생들이 주도해 만든 이 기금은 동기생들이 매달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익변호사로 일하는 동기생의 생활을 돕는 데 활용됩니다. 저 시도는 후배 기수들에게로 이어져 하나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공익법률기금은 1993년 미국 변호사협회가 소속 변호사들에게 연간 50시간 이상의 공익 봉사를 요구한 ‘프로 보노’운동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프로 보노 퍼블리코(Pro Bono Publico·공익을 위하여)’라는 라틴어에서 따온 이 운동은 법조계를 넘어 의료 교육 경영 노무 세무 문화예술 등 거의 모든 전문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평생을 청규 수행으로 일관했지만 불우한 노년을 보낼 처지에 놓인 노스님들에게 사부대중이 부담의 일부나마 나눠지려는 노력도 유사한 의미 안에 놓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