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8월호

    다시듣는 큰스님 법문
    이달의 법문
    화보
    특별기고
    특별인터뷰
    다람살라소식
    금강계단
    불서
    절문밖 풍경소리
    축제와 문화이야기
    반야샘터
    경전이야기
    즐거움을 뿌려라
    건강한 생활
    불서

과월호보기

마음의 문을 여는 데서부터 치유는 시작된다

승한 스님
북한산 중흥사 총무


치유는 마음의 문을 여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마음의 문을 연다는 것은 범사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고, 아주 하찮은 일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때, 마음의 문은 활짝 열린다.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행 자체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 자체를 불행하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아무리 불행한 일일지라도 감사거리는 있다. 예를 들어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고 치자. 그 상황을 불행하다고 받아들이면 그 불행은 끝이 없다. 그러나 그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거리를 찾을 수 있다. 두 다리를 다 잃지 않았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식물인간이 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죽지 않았으니 또한 얼마나 감사한가.
실제로 나와 가장 가까운 내 친구 하나는 그런 불행을 큰 행복으로 바꾸었다. 우리나라 최고 명문대 경영학과를 나와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한 그 친구는 중역으로 승진할 때가 지났는데도 승진하지 못하고 만년 부장으로 지내게 됐다. 그 일로 친구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됐다.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지금 그 상황을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이라고. 명예퇴직 당하지 않고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고 행복하게 받아들이라고. 3년도 지나지 않아 그것은 현실이 됐다. 중역으로 승진한 동기들은 재임용이 되지 않아 2년 만에 대부분 옷을 벗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만년 부장으로 있는 바람에 아직도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 정년이 아직도 3년이나 더 남은 것이다.
감사의 선결조건은 참회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낮춰서 대지가 되고 물이 되는 것이다.
참회를 제대로 하면 실제로 눈물이 많이 나온다. 그 눈물이 물이고 대지다. 그 물이 자신을 정화시켜주고 대지로 만들어 준다. 그 물로 자신의 대지를 깨끗이 헹구고 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감사거리가 아닌 것이 없다.
이때 요구되는 것이 겸손이다. 겸손의 사전적 정의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동한다. 겸손을 ‘굴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겸손과 굴욕은 물론 뿌리가 같다. 겸손은 영어로 ‘humility’이고, 굴욕은 ‘humiliation’이다. 둘 다 ‘humus(흙, 땅)’라는 단어에서 왔다. 즉, ‘hu’는 ‘땅에 속한’ 존재, ‘신이 아닌’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서 ‘겸손(humility)’과 ‘굴욕(humiliation)’은 우리가 모두 ‘땅(대지)’에 속하는 존재들로서 신이 아님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 ‘겸손(humility)’은 자신이 신이 아님을 인정하고 스스로 (낮아져) 땅(대지)이 되는 것인데 반해, ‘굴욕(humiliation)’은 스스로 땅임을 인정하지 않아 신이 땅(대지)이 되도록 (낮아지게) 굴복시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아들 라훌라에게 실제로 ‘대지(흙)가 되라’고 하셨다.
어느 때 붓다와 같이 탁발을 가던 라훌라가 정신을 엉뚱한 데 팔고 있음을 보고 탁발에서 돌아와 라훌라에게 말했다.
“라훌라야, 대지로부터 배워라. 사람들이 그 위에 순결하고 향기로운 꽃, 향수 또는 신선한 우유를 뿌리든 아니면 그 위에 더러운 냄새가 나는 똥, 오줌, 피, 콧물 그리고 침을 버리든 땅은 집착이나 배척이 없이 그 모든 것을 똑같이 받아들인다. 유쾌하거나 불쾌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들이 네 마음에 달라붙거나 노예로 만들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서 부처님은 아들 라훌라에게 ‘대지처럼 되거라’ 하셨던 것이다.
‘인간(human)’이라는 말도 실은 ‘대지(흙, hu)’에서 왔다. ‘human’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원래 대지가 되어 (겸손하게) 살도록 태어났다. 항상 대지가 되어 매사에 겸손하고 감사하게 살라는 뜻에서 인간을 ‘human’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겸손이 참회와 감사의 첫 번째 조건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겸손이 주는 미덕은 말할 수 없이 크다. 가장 큰 미덕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내가 발견한 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거나 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 더 이상 ‘가장 ~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이 있는 그대로 지금의 내가 되면 된다.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된다. 거기에는 어떤 가식도, 가치판단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진실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겸손이고, 참회고, 감사다.
겸손의 미덕을 아는 순간 우리는 우주가 된다. 지금, 현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고 대지처럼 나누기 시작하는 순간, 조그만 장 단지 같던 우리 마음은 금방 항아리가 되고, 쟁반이 되고, 바다가 된다.
겸손의 미덕은 또 있다. 낮다고 생각하는 순간 피라미드의 꼭짓점에 서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우리가 물이 되어 대지를 흐르는 순간 우리는 우리를 향해 흘러드는 수많은 시냇물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는 말이다. 실제로 내가 진행하던 힐링법회에 참석했던 김희자(가명) 보살은 겸손과 참회 감사명상을 통해 깊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김희자 보살이 나의 힐링법회에 참석한 것은 친구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법회가 진행되는 두 시간 동안 내내 김희자 보살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법회가 끝난 뒤 나는 김희자 보살과 잠깐 마음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김희자 보살의 삶은 기구했다. 10년 전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5년 전에는 하나뿐인 스물여섯 살 먹은 아들이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고 만 것이다. 김희자 보살은 그날 이후로 화를 가슴에 담고 살게 됐을 뿐 아니라, 자신도 내일 죽을 것이라는 죽음 공포증과 건강 염려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됐다.
다음날 아침부터 나는 김희자 보살에게 108배 참회 감사기도를 시켰다. 그런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김희자 보살로부터 감사 전화가 왔다. 스님 말씀대로 매일 아침 참회 감사 기도문을 외우며 108배 기도를 했는데 답답하던 가슴이 확 트이며 죽음에 대한 공포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 김희자 보살에게 나는 아낌없는 칭찬과 찬탄의 박수를 보내줬다.
김희자 보살의 마음이 열린 원리는 간단하다. 참회 감사기도를 하는 동안 가슴 저 밑바닥 지하밀실 13층에 숨어있던 어둠의 고통들이 눈물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김 보살의 화와 죽음의 공포를 정화시켜준 것이다. 100일 참회 감사기도를 끝낸 지금 김희자 보살은 마음의 평화와 행복은 물론 건강까지 완전히 되찾았다.
마음의 문은 이처럼 겸손과 참회와 감사가 선행될 때 자신의 맨살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맨살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치유되고,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대지로 변해있는 자신의 지평을 보게 된다. 셀프 힐링(self healing)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 힐링은 멀리 있지 않다. 자신 속에 들어있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 보고 관찰하면 답은 그 속에 이미 들어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