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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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불교인生活佛敎人의 실천덕목實踐德目

정우頂宇 스님
본지 발행인
구룡사 회주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는 공업共業에 의해서 불안전한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이 일어날 때 우리 선조들이 위로를 삼았던 지혜로운 말씀이 있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不幸中多幸이다, 천만다행千萬多幸이다’ 하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우리나라 항공기가 미국 공항에서 큰 어려움을 겼었는데, 그나마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질 수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은 중국의 두 여학생과 부상당한 승객들의 조속한 쾌유와 극락왕생을 발원 합니다.
기도祈禱 정진精進하는 것은 우리네 인생이 어렵고 힘든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벌어질 때, 이를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키워가는 힘입니다. 기도와 정진에는 철저한 수행修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수행이 없는 기도와 정진은 단순한 신앙信仰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신행자信行者이어야 합니다.
지난 일요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달라이라마 스님의 78회 생신을 축하하는 장수기원 법회가 있었습니다. 이날 법회의 발원문을 들여다 보면, ‘존자님의 수명을 수호하여 주시어 부처님의 정법正法이 널리 전해질 수 있도록 가피加被를 내려주소서’ 하는 염원이였습니다.
오늘, 이 법석에서도 우리들이 기도하는 모습은 가피입니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전에 공양을 올리는 기도입니다. 부처님 재세시在世時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없는 선지식善知識인 스승님께 공양 올리는 연유는 닫혀있던 마음에서 열린 세상의 문에 다가가고자 하는 간절함입니다.
기도를 통해 생각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마음 챙김을 정념正念의 수행이라 할 것입니다.
원효元曉대사는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서, ‘파거불행破車不行이요 노인불수老人不修’라 했습 니다. 부서진 수레(자동차)는 굴러갈 수 없으며 노인은 공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인은 육체적 늙음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거나 타성에 젖어 무기력해지고 불감증에 빠지지 말라는 경계의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을 구하려는 이는 마땅히 네 가지 선근善根을 닦아야 합니다.   
첫째, 대보리심大菩提心을 일으켜 차라리 이 목숨 다할지언정 물러서지 않는 일입니다. 불퇴전    不退轉의 정진력精進力입니다.
둘째, 선지식을 가까이해서 깨달음을 이루는 일입니다.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대중과 더불어 살겠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데 망설임이 없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오?”
“재미없는 재미로 삽니다.”
내 스스로 자문자답自問自答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생각조차도 없어졌습니다.
“이젠 재미없는 재미도 없습니다.”
그동안 재미없는 재미가 참 재미인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무상지상無上之相이 실상實相』이라 하였습니다. 생멸生滅이 없고, 증감增減이 없고, 미추美醜가 없고, 대소大小가 없고, 장단長短이 없고, 동서東西가 없고, 남북南北이 없고, 전후前後가 없고, 좌우左右가 없는 모양이 실다운 모양이요 참다운 모양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양 없는 모양이요 형상 없는 형상입니다. 그것을 다시 들여다보니 ‘유상지상有相之相이 허상虛相’입니다. 생멸이 있고, 증감이 있고, 미추가 있고, 대소가 있고, 장단이 있는 현상입니다. 실다운 모양이 아니라 변화 되어지는 허상입니다. 중생심衆生心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의 가르침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비유컨대 설산동자雪山童子의 구법행求法行입니다.
설산동자는 부처님께서 전생前生에 수행하시던 시절의 이름인데, 제석천왕이 설산동자의 공부를 시험하기 위해서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사는 나찰羅刹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제행무상 諸行無常하여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항상함이 없어 변화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생하고 멸하는 우주의 법칙”이라는 게송을 읊었습니다.
이 가르침은 그동안 자신이 구하고자 했던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무한한 기쁨을 느낀 설산동자는 주변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주위에는 나찰밖에 없었습니다. 그 나찰에게 다가가 마지막 목마름의 가르침을 청합니다. 그러나 나찰은 인간의 살과 피를 요구 합니다. 이에 설산동자는 원하는 가르침을 말해주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약속 합니다.
“생멸멸이生滅滅已하면 적멸위락寂滅爲樂”이니라, “생하고 멸하는 것 마저 멸하면 고요한 적정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되리라.”
설산동자는 이 가르침을 받아 지니고 나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절벽으로 올라가 몸을 던집니다. 선가禪家에서의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진일보進一步한다’는 실천의 가르침인 덕목입니다.
믿음이 확고한 법을 구하기 위해서는 천길 만길 절벽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지닐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지식의 가르침은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설산동자는 그 가르침에 가까이하고자, 몸을 던졌습니다. 그런 믿음과 확신, 그런 용기와 지혜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셋째, 참고 견디는 인욕忍辱을 닦음에 있어서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인욕이라 하면 흔히 고통과 괴로움만 참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쁘고 즐거움도 참을 줄 알아야 진정한 인욕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칼날도 양면을 적당히 갈았을 때 잘 듭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쉽게 무뎌지는 그 이치를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사고思考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넷째, 고요한 경계, 번뇌煩惱를 끊는 경지, 이것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목숨을 다할지언정 그냥 쉽게 사는 세상에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4선근四善根을 잘 닦아 나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수행정진을 하는 수행자입니다.
장마철이라 날씨가 우중충하니, 40여 년 전 오대산五臺山에서 있었던 일화가 생각이 납니다.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의 선방禪房에서 스님들이 정진을 하는데, 평소에 모범적이던 한 스님이 몸도 쇠약해지고 날씨도 무더운 날에 자꾸 딴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눈을 감고 망상    妄想을 피우다가 살짝 눈을 떴는데 한 여름날 장마철에 청춘남녀가 우산도 없이 절 마당을 걸어가고 있는 겁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크게 웃었습니다.
선방에서 정진하다가 크게 웃으면, 깨달음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스님이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그 스님 앞에 삼배를 올리고 크게 웃은 그 소식을 청했다고 합니다. 그냥 법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후원의 원주院主스님을 불러 대중공양大衆供養까지 푸짐하게 차리게 하고 공양 후에 정중하게 다시 법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그 스님께서는 법상에 올라가서 주장자를 세 번 치신 뒤, “시삼마(是甚., 이 도리를 아는가?) 허심청법하라.(虛心聽法, 대중들은 빈 마음으로 들으라.) 사람의 콧구멍이 아래쪽으로 뚫린 도리를 알았도다. 억 ~ ~ ~”
그리고는 법상에서 내려왔습니다. 허허허…. 대중은 웃었습니다.
그 스님의 경계, 깨치기는 깨치신 것입니다. 뭘 깨쳤냐하면,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 등산 왔다가 우산도 없이 지나가는 청춘남녀의 콧구멍이 위로 뚫렸더라면 빗물이 콧구멍으로 들어갔을 텐데, 다행히 밑에 있어서 우산을 안 쓰고도 잘 걸어갈 수 있는 도리를 깨친 것입니다.
이 작은 깨달음의 이야기에도 대중들은 파안대소破顔大笑를 일으키게 하는 것을 보면, 환희법열의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을 때, 그 어떤 일도 행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이는 듯 싶어 집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결과는, 수단手段과 방법方法과 행위行爲를 올바르게 하는 정당한 수행이어야  합니다.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상모략中傷謀略하고 시기질투猜忌嫉妬하고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쓰는 일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이들은 반드시 알았으면 합니다. 천년의 푸르름과 향기를 지닌 저 소나무도 시발점은 작은 솔방울의 씨앗인 솔 씨에서, 작은 움을 틔우는 세월의 깊이로 아름드리 기둥이 되고 대들보가 되는 그 이치를 살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어느 스님께 “불교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제악막작諸惡莫作하고 중선봉행衆善奉行하라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뭇 선은 받들어 행하라.)” 하였습니다.
이에 질문을 했던 이가 다시 묻기를, “그건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겠습니다.”
그러자 스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알 수는 있으나, 나이 많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자정기의自淨基意하면 시제불교是諸佛敎이니라.’ 그 뜻을 스스로 헤아려 살피면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과거의 몸으로 지은 업業을 스스로 뉘우쳐 방종放縱하거나 방일放逸하지 않으면, 지혜智慧가 생기고 죄업罪業을 멸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증장增長되면 복福을 지을 수 있고, 나눔을 통해서 덕德을 쌓으면 우리네 인생은 아름다움으로 꽃피울 수 있습니다. 과거의 마음으로 지은 악업을 스스로 참회懺悔하고 부끄러워하면, 마음은 맑고 깨끗하여져 지혜가 저절로 생깁니다. 지혜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無明)이 사라진 경계가 밝음인 지혜입니다.
밝음이 있어서 어둠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사라져 밝음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뉘우침도 선행善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후회하는 인생을 살지 마라. 뉘우침으로 반성하고 성찰하는 인생을 살아라.’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날마다 초하루였으면 합니다. 초하루 법회시간에 이렇게 많은 불자들과 함께하는 그 시간을, 공동체共同體의 어울림으로 끊임없이 확인하고, 다짐하고, 인식해가는 모습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그러한 공동체를 통해서 올곧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부처님 품안과 따뜻한 가정의 생활불교인生活佛敎人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E-mail : asanjungwoo.gmail.com